지금은 새벽 한 시 반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바깥은 어둡다. 그것도 어정쩡하게 어두운 도시의 밤이 아니라, 창밖으로 손을 내밀면 손가락이 검게 물들어 버릴 것만 같은 진짜 어둠이 깔린 밤이다. 우리 집 뒤쪽은 바로 산이라 밤의 어둠이 정말로 깊고 조용하다. 달이나 별이 총총한 밤에는 주변의 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는데, 오늘 밤에는 그들도 어둠 속에 푹 묻혀 버리고 말았다.
두 마리의 고양이도 완전히 잠들었다. 곤하게 자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나는 항상 마음이 놓인다. 적어도 고양이가 안심하고 잘 수 있는 동안은 특별히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내가 어딜 좀 갔기 때문에 집 안에는 나 혼자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책상 앞에 앉아서 이 원고를 쓰고 있다.
새벽 한 시 반에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원고를 쓰고 있다니, 참 오래간만이다. 적어도 요 1년 동안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내가 어째서 이런 시간에 깨어 있는가 하면, 너무 빨리 잠자리에 들어서 밤 열두 시 반(즉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전)에 퍼뜩 눈이 떠졌기 때문이다. 역시 오후 일곱 시 사십 분에 잠자리에 든 것은 너무 일렀다.
그러고 보니 왠지 시차 병에 걸린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가끔은 이런 일이 있어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다. 이렇게 한밤중에-고양이도 잠들어 버린 한밤중에-외톨이가 되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다.
부엌에 가서 보조레의 코르크 마개를 따고, 잔과 함께 가져와 책상 위에 놓는다. 그리고 벌써 반년이나 듣지 못했던 빌리 홀리데이의 레코드를 턴테이블에 얹고, 바늘을 그 위에 올린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요즘 빌리 홀리데이의 레코드를 그다지 듣지 않게 된 건 밤늦게까지 깨어 있던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기야 오후 두 시 반에 케이크를 먹으면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듣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하다.
오래된 레코드라서 빠지직빠지직 잡음이 들어가 있다. 아니, 잡음이 들어가 있다기보다는 잡음 투성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레코드를 대학생 때 샀으니까, 7~8년은 족히 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최초로 산 빌리 홀리데이의 레코드다. 지금도 나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버브(폴리돌)의 <빌리 홀리데이의 혼>이라는 편집 레코드로, A면은 1946년에 있었던 JATP의 라이브, B면은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앤솔러지(야마토 아키라 씨의 추천곡)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은 A면인데, 우선 <보디 앤드 소울>과 <스트레인지 프루트>라는 압도적인 중량급 가창력을 느낄 수 있는 노래로 시작하여, <트래블링 라이트>, <히즈 퍼니 댓 웨이>로 약간 밝아지고, 이어서 <더 맨 아이 러브>, <더 베이비 에인트 아이 굿 투 유>로 느릿느릿 나가다가, <올 오브 미>로 거침없이 치닫고, 그 유명한 <빌리즈 블루스>로 단숨에 마무리되는 구성이다. <보디 앤드 소울>로 시작되는 구성이 약간 불만스럽지만(맨 첫 곳으로 듣기에는 너무 압도적이다), 이 레코드의 연주에는 지긋이 귀를 기울이면 빌리 홀리데이라는 사람이 정말로 굉장한 사람이었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된다.
빌리 홀리데이는 한때 지나치게 신격화되었던 적이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은 약간 짜증이 나 멀리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좋을 그런 주변적인 일들에서 완전히 벗어나 허심탄회하게 음악 그 자체에 귀를 기울여 보면 역시 진지하게 노래를 듣게 만드는 멋진 가수임을 알 수 있다. 옛날에도 멋지다고 생각했었지만 나이를 먹어 새삼스레 다시 들어보니 그 훌륭함이 훨씬 분명하게 이해되었다.
그녀의 노래에는 몸속 깊은 곳에서 자연히 배어 나오는 원액 같은 것-그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청중들을 압도하고, 감싸 안고, 도취시키고, 완전히 뻗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음악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갑자기 나 자신이 어디인지 잘 알 수 없는 곳에 파묻혀 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때때로 이건 대체 어찌 된 일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노래는 그저 노래일 뿐이다. 골똘히 생각한다 해서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와 흔하디 흔한 다른 재즈 가수의 노래가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층성일 것이다. 요컨대 그녀의 노래에 포함된 어떤 요소는 듣는 쪽이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랍 속 깊숙한 곳에서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미 개봉된 편지처럼, 예정된 그날이 와야지 겉으로 드러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해독할 수 있는 날이 되면 그냥 자연히 해독되는 것이다.
그런 음악이 있다는 것은 역시 멋진 일이다. 젊은 시절에 숨이 막힐 듯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들어도 무엇 하나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던 부분이, 지금 이렇게 포도주 잔을 기울이면서 멍하니 듣고 있을 뿐인데도 실타래가 풀리듯이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가 된다. 그러고 보니 나이를 먹는 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버브 판 빌리 홀리데이도 좋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녀의 베스트 레코드는 미국 컬럼비아에서 나온 <더 골든 이어즈 VOL.1>이라는 세 장짜리 앨범이다. 이 석 장의 레코드는 진짜 많이 들었다. 그 정도로 듣고 또 들었던 재즈 보컬의 레코드는 또 없을 것이다. 버브나 컬럼비아나 데카의 빌리 홀리데이가 각각 나름대로 훌륭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초일류급 스윙 밴드를 배경으로 불러 젖히던 1930년대, 1940년대의 이 컬럼비아 판 빌리 홀리데이는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산뜻하고, 그리고 완벽하다. 아슬아슬하고, 꼼짝도 할 수가 없고,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행복하며, 그리고 참을 수 없이 슬프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방비 상태며, 그러면서도 손을 대기가 어렵다.
특히 레스터 영이 함께 한 트랙은-<웬 유 아 스마일링 아이 캔트 겟 스타티드>-주옥같이 아름답다. 만약 앞으로 빌리 홀리데이를 들어 보고 싶은 젊은이가 있다면 나는 역시 이 레코드부터 들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유명한 <스트레인지 프루트>를 불렀을 무렵의 빌리 홀리데이는-이상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가장 먼저 듣기에는 좀 너무 위태로운 것같이 내게는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버브 판은 한밤중에 혼자서 듣기에는 너무 슬프다.
이따금 밤에 재즈를 들을 수 있는 바에 가면 버브 시절의 빌리 홀리데이 노래가 흘러나올 때가 있다. 그녀의 그런 노래-가령 <올 오아 낫싱 앳 올>-를 들으면서 위스키를 마시다 보면, 왠지 나 혼자만이 중력이 다른 해저나 그 어딘가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무척 깊은 곳이어서 위로는 올라갈 수 없고, 제대로 걸음을 옮기기조차 힘겹다. 그래서 그저 위스키 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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