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소설을 쓰는 일이 겨우 마무리되고 필름 교정도 끝나, 출판되기만을 기다릴 때가 나에게는 가장 마음 편하고 평온한 시기다. 쓰고 싶은 건 다 썼고, 일단 해야 할 일도 없으니까-그렇긴 해도 때로는 생활을 위해 이런 원고도 쓰곤 하지만-매일 멍하니 툇마루에 앉아서 고양이랑 봄볕을 쬔다. 나는 내가 쓴 글이 활자화되어 세상에 나올 때까지는 도무지 다음 소설에 착수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몇 개월쯤은 좋건 싫건 빈둥빈둥 놀면서 보내게 된다.
이렇게 하강 기류를 탄 것처럼 마음 편한 시기에는 대체로 영화를 왕창 본다. 최근에는 비디오테이프도 많아졌고 나도 자주 대여점 신세를 지고 있지만, 역시 이런 한가한 시기에는 영화관까지 전철을 타고 진출해서 어둠 속에서 스크린을 노려보다가 맥주 집에서 한잔 걸치고 돌아오는 게 제일이다. 영화관에서 보고 있는 한, 마누라가 "저것 좀 봐요, 다이안 키튼이 입고 있는 저 스커트 괜찮지 않아요?"라며 쿡쿡 찌르는 일도 없고, "잠깐 되돌려 봐요. 저 플로어 스탠드 비쌀 것 같네" 하는 일도 없다. 플로어 스탠드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이번 봄에도 그런 이유로 해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보았다. <듄, 모래의 혹성>을 보고, <2010년>을 보고, <터미네이터>와 <리틀 드러머 걸>을 보고, <네버 엔딩 스토리>를 보고(어째서 타이틀을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은 걸까?), <아마데우스>를 두 번 보고, <사랑에 빠져서>와 <슛 더 문>을 보고, <베스트 키드>를 보고, 바빠서 놓쳤던 <보디 더블>과 <젊은 사자들>(이 영화는 <에스콰이어>지 선정 1984년도 좋지 않은 영화다)을 재개봉관까지 쫓아가서 보고, 오래간만에 방화도 보고...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봤다. 이 정도로 연달아서 영화관에 드나들면 과연 영화를 보았구나 하는 보람 같은 게 느껴진다.
영화라는 것은 의자에 털썩 앉아서 머리를 텅 비워 놓고 있으면 저쪽에서 알아서 필름을 돌려 진행시켜 주므로 정말 편하다. 연극이나 콘서트 같으면 "오늘은 흥이 덜 나는 게 아닌가?" 라든지, "어딘가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건 아닌가?" 내지는, "박수는 이 정도만 치면 될까" 하는 등 나름대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어 좀처럼 머리를 비워 놓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 죄 없는 할리우드 영화를 멍하니 보는 게 상책이다. 뭔가 계몽을 시키려 들면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고 만다. 이번에 본 일련의 영화들은 모두 비교적 재미있고, 심하게 계몽시키려는 부분도 없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트루먼 카포티는 그의 소설 속에서 영화를 종교적 의식에 비유했는데, 확실히 그런 말을 들으면 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 혼자 스크린과 마주하고 있으면 왠지 내 혼이 잠정적인 장소로 밀려난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영화관을 드나드는 사이에, 그런 기분이 내 인생에 있어서는 계속 이어져야 할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 중독이다.
일찍이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영화관을 찾았다. 마침 학원 분쟁이 일어났던 무렵이어서 수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파트와 아르바이트와 영화관이라는 트라이앵글을 뱅글뱅글 돌았었다. 물론 매일매일 볼 수 있을 만큼 영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같은 필름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보거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B급, C급 영화를 뼈다귀라도 쪽쪽 빠는 듯한 기분으로 보았다. 그러다 보니 꿈속에서 MGM의 사자가 포효를 하기도 하고, 도에이의 파도가 부서지고, 20세기 폭스의 라이트가 광고와 함께 돌아가기도 했다. 여기까지 이르면 이건 이미 완벽한 병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른바 '명작'보다는 볼 만한 영화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되풀이해서 봤던 필름이나 별 내용도 없는 작품 쪽이 생생하게 기억나니 이상한 일이다. 별 내용도 없는 B급, C급 작품은 이른바 '명작'과는 달리 내 스스로가 어떻게 해서든 괜찮은 부분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단순한 시간 낭비가 되고 만다. 그런 긴장감을 그대로 마음에 확실하게 새겨 두었기 때문에 훗날까지 기억에 남는 건 아닐까? 한마디로 영화라 해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 본 영화중에서 그런 B급, C급 작품 감상의 묘미를 맛보게 해준 건 뭐니 뭐니 해도 존 밀리어스의 <젊은 사자들>이었다. 다들 이 영화를 호전적이며 황당무계한 영화라고 말하고 분명히 그렇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여긴 것은 미국이 소련과 쿠바 연합군에게 점령당한 데 대해 미국의 소년들이 게릴라전으로 저항한다는 상황 설정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입장과 위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물론 상황 설정 자체에 상당한 무리가 있고 작품 자체가 뒤죽박죽이었지만, 뒤죽박죽인 만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끈질기고도 강인한 반전 영화로 완성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타입의 영화를 퍽 좋아한다.
그 후 <젊은 사자들>의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다시 보았는데 역시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록키4>나 <람보2> 같은 훨씬 노골적인 반공 영화가 나온 지금으로선, 고상하게 비쳐지는 장면도 있다. 밀리어스가 너무 일찍 시도했던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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