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바다에는 평평한 신기루와 같은 커다란 부표가 두 개 옆으로 나란히 떠 있었다. 물가에서 부표까지 클로로 50 스트로크(수영에서 손발로 한 번 젓기), 부표에서 부표까지 30 스트로크였다. 수영하기에는 적당한 거리이다. 하나의 부표 너비는 방으로 말하면 6조(다다미 6장) 정도로 그것이 쌍둥이 빙산같이 두둥실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다. 물은 어느 쪽이냐 하면, 부자연스러울 만큼 투명해서 위에서부터 들여다보면 부표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놓은 굵은 쇠사슬이랑 그 앞의 콘크리트 방 추석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수심은 대강 5미터에서 6미터 정도일 것이다. 파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물살은 일지 않았기 때문에 부표는 거의 흔들리지도 않고, 마치 긴 못으로 단단히 해저에 고정된 것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부표 위에 서서 해안 쪽으로 눈을 돌리면, 길게 옆으로 뻗은 흰 모래 사장이랑 붉게 칠해진 라이프 가드(감시원, 구조원)의 감시대랑 일렬로 늘어선 야자나무의 녹색 잎사귀를 바라다볼 수 있었다. 멋들어진 경치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림엽서 풍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니까 뭐 트집 잡자는 것은 아니다. 해안선을 오른쪽으로 죽 눈으로 더듬어, 모래사장이 끝나고 울퉁불퉁한 검은 바위밭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주변에 내가 묵고 있는 코티지(별장)식 호텔이 보였다. 호텔은 흰 벽으로 된 2층 건물로 지붕 색은 야자수 잎보다 조금 더 짙은 녹색이었다. 계절은 6월말로, 아직 시즌이 되려면 멀었으므로 해안에는 셀 수 있을 만큼의 사람밖에 없었다.
부표 위의 하늘은 미군기지로 향하는 군용 헬리콥터가 지나는 항로가 되고 있었다. 그 헬리콥터들은 앞바다에서 똑바로 다가와서 두 개의 부표 정 중간께를 지나서 야자나무의 열을 넘어 내륙 쪽으로 사라져갔다. 자세히 바라보면 파일럿의 얼굴까지 보일 정도의 저공 비행이었다. 기체는 무거운 색조의 올리브 그린이고, 눈앞에는 곤충의 촉수처럼 곧은 레이더 안테나가 앞 쪽으로 내밀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군용 헬리콥터가 날아오는 걸 제외한다면, 그곳은 잠이라도 깊이 들어 버린 것 같은 조용하고 평화스런 해안이었다.
우리의 방은 2층 건물인 코티지의 1층에 있고 창은 해안에 면해 있었다.
창의 바로 아래에는 철쭉과 아주 닮은 붉은 꽃이 어우러져 피어 있었고, 그 건너편으로 야자나무가 보였다. 정원의 잔디는 깨끗하게 잘 손질되어 있었고, 부채꼴로 머리를 흔드는 스프링쿨러가 달그락달그락하는 졸린 듯한 소리를 내면서 하루 종일 주위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창틀은 볕에 잘 그을린 녹색이고, 베네치안 블라인드는 아주 조금 녹색이 가미된 흰색이었다.
방 벽에는 고갱의 타이티 그림이 2장 걸려 있었다. 코티지의 한 동은 네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층에 두 방, 2층에 두 방이다. 우리 옆방에는 모자간인 두 사람의 일행이 묵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우리가 찾아오기 전부터 계속 그곳에 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맨 처음에 이 호텔에 도착해서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열쇠를 받거나 짐을 옮기게 하거나 하고 있는 동안 그 조용한 두 사람은 로비의 깊숙한 소파에 마주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모친도 아들도 각자의 신문을 손에 들고서, 마치 정해진 시간을 인위적으로 지연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신문의 구석구석까지 훑어보고 있었다. 모친은 60세에 가까운 50대, 아들 쪽은 우리와 비슷한 정도의 나이인 28살이나 29살 정도였다. 두 사람 모두 얼굴 생김새가 훌쭉하고 이마가 넓고 언제나 내리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이 정도로 아주 닮은 모자(母子)를 나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었다. 모친은 그 나이의 여성으로서는 놀랄 만큼 키가 크고, 등뼈가 곧고, 손발의 움직임도 빠릿빠릿했다. 두 사람 모두가 어쩐지 바느질이 잘 된 테일러드 슈트 같은 분위기였다.
아들 쪽도 몸매로부터 추측하면 모친과 마찬가지로 키가 상당히 클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키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내내 휠체어에 앉은 채 한 번도 일어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상 모친이 뒤에 서서 그 휠체어를 밀어 주었다. 밤이 되면, 그는 휠체어에서 소파로 옮겨 거기서 룸서비스로 제공받은 저녁을 먹었고, 그런 다음에는 책을 읽는 따위로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방에는 물론 쿨러가 켜져 있었지만, 모자는 그 스위치를 끈 채로 두고 언제나 입구의 도어를 열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들게 하고 있었다. 아마 쿨러의 바람이 그의 몸에 좋지 않은 것이겠거니, 하고 우리는 추측했다. 그들의 문 앞을 통하지 않고는 방의 출입을 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그 때마다 그들의 모습을 보게끔 되었다. 입구에는 발 같은 스크린이 쳐져 있어서 일단 눈가리개 역할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대강의 실루엣은 어쨋든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항상 소파 세트에 마주 앉아 책이나 신문이나 잡지 따위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말이 없었다. 그들의 방은 언제나 박물관같이 조용했고, TV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냉장고의 모터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두 번 가량 라디오 소리가 들렸던 적이 있었다.
한 번은 클라리넷이 포함된 모차르트의 실내악이고, 또 한 번은 내가 모르는 관현악곡이었다. 아마 리히알트 슈트라우스나 그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제외한다면, 그 밖에는 실로 고요했다. 이를테면, 모자라기보다는 노부부가 묵고 있는 방 같았다.
식당이나 로비나 복도나 정원 산책로에서 우리와 그 모자는 자주 얼굴을 마주쳤다. 원래가 자그마하고 아담한 규모의 호텔인 데다, 시즌전으로 손님의 수도 아직 적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서로의 얼굴이 눈에 잘 띄게 된다. 얼굴을 마주치면, 우리는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인사를 했다. 모친과 아들은 인사 방식이 약간 달랐다. 아들 쪽은 턱과 눈을 흘끗 움직일 정도의 희미한 인사이고, 모친 쪽은 상당히 예절바른 인사였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들의 인사에서 받는 인상은 비슷한 정도의 것이었다. 그것은 인사로 시작해서 인사로 끝날 뿐, 그 다음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호텔 다이닝룸에서 그 모자와 이웃하게 되었어도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했고, 그 모자는 모자간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아이를 낳을까 말까며 이사와 빚이며 일의 장래 등을 의논했다. 그것은 우리 두 사람에게는 20대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그 모자가 어떤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있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대체로 말이 없었고, 입을 열어도 대단히 목소리가 작았기 때문에-마치 독순술(讀脣術)이라도 쓰고 있는 것 같았다-나로서는 도저히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조용하게, 마치 깨질 것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식사를 했다. 나이프나 포크나 스푼 소리조차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끔 그들 모두는 환영이어서 뒤 테이블을 돌아보면 사라지고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침식사를 마치면 우리는 매일 아이스박스를 가지고 해변으로 나갔다. 우리는 몸을 태울 때 바르는 오일을 바르고, 비치매트에 누워서 몸을 태ㅇ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에서 롤링 스톤즈나 마빈 게이를 듣고, 그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문고판을 다시 읽고 있었다.
태양은 내륙으로부터 얼굴을 내밀어 헬리콥터와는 반대 진로를 취해서 수평선으로 가라앉았다.
늘 2시 무렵이 되면 휄체어의 모자가 해변에 찾아왔다. 모친은 깔끔한 모양의 수수한 색조로 된 반소매 원피스에 가죽 샌들을 신었고, 아들 쪽은 알로하 셔츠나 폴로 셔츠와 면으로 된 슬랙스와 같은 차림이었다. 모친은 챙이 넓은 흰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고, 아들 쪽은 모자 없이 짙은 녹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야자나무 그늘에 앉아서 딱히 무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늘이 이동하면 그들도 거기에 맞춰 조금 이동했다. 두 사람은 휴대용 은색 포트를 지참하고 있어서 때때로 그 포트로부터 종이컵에 음료수를 부어 마셨다. 무엇을 마시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뒤에 두 사람이 크래커 같은 것을 먹고 있을 때도 있었다.
두 사람은 30분 정도 있다가 어딘가로 떠나 버리는 일도 있었고, 3시간이나 그곳에 꼼짝 않고 있는 적도 있었다. 수영을 하다 보면, 몸 위로 그들의 시선을 느낀 적도 있었다. 수영을 하다 보면, 몸 위로 그들의 시선을 느낀 적도 있었다. 부표 근처에서 야자나무의 행렬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 내 눈의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부표에 올라서서 야자나무 그늘 쪽으로 눈을 돌리면 그들이 확실히 내 쪽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종종 그들의 은색 포트가 나이프 같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이 보였다. 부표 위에 엎드려 멍하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점차 거리의 밸런스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들이 아주 조금만 손을 뻗어도 그들의 손이 내 몸에 닿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50 스트로크 정도의 차가운 물 따위는 전혀 의미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어째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 자신으로서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런 나날이, 높은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천천히 지나갔다. 하루와 하루 사이에 확실히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은 두드러진 특징은 없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헬리콥터가 하늘을 날고, 나는 맥주를 마시고 헤엄쳤다.
호텔을 떠나기 전날 오후,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수영을 했다. 아내는 낮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헤엄쳤다. 토용일인 탓에 해안의 인파는 평소보다 약간 많았지만, 그렇더라도 역시 해변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몇 쌍인가의 남녀가 모래 위에 엎드려 살갗을 태우고, 가족 동반인 일행이 물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몇 사람인가는 언덕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수영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해안 기지로부터 온 것 같은 한 무리의 미국인들이 야자나무에 로프를 치고 비치발리볼을 하며 놀고 있었다. 모두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고, 키가 컸고, 머리는 짧았다. 군인이란 어느 시대에도 비슷한 얼굴 생김새를 하고 있다.
내다보았더니 두 개의 부표 위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태양은 높고 하늘엔 한 조각의 구름도 없었다. 시계 바늘은 2시를 지나고 있었지만, 휠체어의 모자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발을 물에 담그고 가슴 근처의 깊이가 될 때까지 바다를 향해 걸었고, 그런 다음에 왼쪽의 부표로 방향을 돌려서 클롤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어깨의 힘을 빼고 물을 몸에 감듯이 천천히 헤엄쳤다. 서둘러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른손을 빼서 똑바로 앞쪽으로 뻗고, 그 다음엔 왼손을 빼서 뻗는다. 왼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물에서 얼굴을 들어 신선한 공기를 폐 속으로 보낸다. 물을 튀기면 그것이 태양빛으로 하얗게 빛났다. 모든 것이 내 주위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스트로크의 수를 세면서 헤엄쳤다. 40까지 세고 나서 앞쪽을 바라보니, 부표는 이미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정확히 10스트로크로 내 왼손 끝이 부표의 측판에 닿았다. 정확하게 언제나 그대로였다. 나는 그 상태로 잠시 바다 위에 떠서 호흡을 조절한 뒤, 부착된 사다리를 붙잡고 부표 위로 올라갔다.
표 위에는 뜻밖에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블론드 머리의 볼 만하게 살찐 미국 여인이었다. 해변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부표 위에 사람의 모습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그것은 그녀가 부표의 가장 안쪽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어서 눈에 띄기 어려웠던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보았을 때 그녀는 때마침 부표의 그늘진 부근을 헤엄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튼 그녀는 부표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흔히 밭에 세워져 잇는 <농약살포 주의> 깃발 같은 빨갛고 작은 비키니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토실토실하게 살이 쪄 있었기 때문에 비키니는 실제 이상으로 작아 보였다.
이제 막 수영하러 온 듯이 피부는 레터 페이퍼(편지지)와 같이 희었다. 내가 물을 떨어뜨리면서 부표에 오르자, 그녀는 아주 조금 눈을 뜨고 내 모습을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가 자고 있는 것과는 반대 쪽 끝에 앉아 양 다리 끝을 물에 담그고 해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야자나무 밑에는 아직 모자의 모습은 없었다. 야자나무 밑에도 그 밖의 어느 곳에도 그들의 모습은 없었다. 해안 어느 곳에 있더라도, 그들의 티 한점 없는 은색 휠체어는 반드시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못 보고 놓칠 리도 없다. 그들은 2시가 되면 언제나 도장을 찍듯이 해안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서 나는 어쩐지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습관이란 것은 묘한 것이다. 그저 대수롭지 않은 요소가 빠진 것만으로 자신이 세계의 한 부분에서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혹은 두 사람은 이미 호텔을 떠나서 어딘가-어디라도 좋다. 그들이 원래 존재하고 있던 장소-로 돌아가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과 조금 전 런치타임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얼굴을 마주쳤을 때, 그들에게서 그런 느낌은 조금도 받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시간을 들여 <오늘의 런치>를 먹고 식후에 아들은 아이스티를 마시고 모친은 푸딩을 먹고 있었다. 그런 뒤에 바로 짐 꾸리기에 매달릴 것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여자와 같은 모양으로 엎드려서 작은 파도가 부표의 측판을 때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10분쯤 몸을 태웠다. 흰 바다 새가 마치 자를 이용해서 하늘에 선을 긋는 것처럼 똑바로 뭍을 향해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귓속으로 들어간 물방울이 태양빛으로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강한 오후 햇살이 수많은 침이 되어서 땅이랑 바다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몸을 적시고 있던 바닷물이 증발해 버리자, 곧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몸을 적시고 있던 바닷물이 증발해 버리자, 곧 바로 땀이 나기 시작해 온 몸을 적셨다. 더위로 참을 수 없게 되어 얼굴을 들자, 그녀 쪽은 이미 몸을 일으키고 양 손을 무릎에 대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작고 빨간 비키니가 부풀어 오른 흰 살에 확실하게 죄어 있고, 둥근 땀방울이 먹이 주변에 떼 지어 모인 아주 작은 벌레같이 그 주위를 덮고 있었다. 배 둘레에는 마치 토성의 테두리같이 지방이 달라붙어 있었고, 손목이며 발목의 잘록한 부분조차도 조금 있으면 사라져 없어질 것 같았다. 그녀의 나이는 나보다 얼마인가 위로 보였다. 그렇긴 하지만, 그다지 차이가 날리는 없다. 둘이나 기껏해야 셋 정도일 것이다.
여자의 살찐 상태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얼굴 생김새도 흉하지 않았다. 단지 살이 과하게 붙어 있을 뿐이다. 자석이 철분을 빨아 당기는 것처럼 지방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것이다.
그녀의 지방은 귀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어 완만한 슬로프(경사)를 그리며 어깨로 내려가, 그대로 팔의 부푼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미쉐린 타이어 간판의 타이어 사내 같았다. 그녀의 그런 비만은 내게 무언가 숙명적인 것을 상기시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경향은 전부 숙명적인 병인 것이다.
"굉장한 더위 아니에요?" 하고 건너 편 끝에서 여자가 영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대개의 살찐 여자가 그러한 것처럼 조금 달콤한 느낌이 드는 높은 목소리였다. 낮은 목소리를 내는 살찐 여자는 그다지 만났던 적이 없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정말이군요."하고 나는 대답해 주었다.
"저어, 지금 몇 시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특별한 의미도 없이 해변으로 눈길을 돌리고 나서
"2시 30분이나 40분이나, 아마 그쯤이겠지요."하고 말했다.
"흐음."하고 그녀는 그다지 신경 쓸 것 없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손을 주걱처럼 사용해서 콧등과 부풀어 오른 양쪽 뺨에 붙었던 땀을 닦아냈다. 시간이 몇 시이든, 그런 것이 그녀에게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저 무언가를 물어 보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순수하게 독립적인 존재이고, 그와 같이 독립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나는 슬슬 차가운 물속에 뛰어들어서 또 다른 부표까지 헤엄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와의 대화를 피하고 있다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것은 조금 후에 하기로 했다. 나는 부표의 끝에 걸터앉은 채로 여자가 뭔가 말을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묵묵히 있자니, 땀이 눈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소금기로 인해 안구가 따끔거렸다. 살갗이 긴장되어 군데군데 갈라져 버릴 듯한 정도의 햇살이었다.
"매일 언제나 이렇게 더운가요?" 하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줄곧 이 정도였지요. 오늘은 구름이 전혀 없어서 그만큼 더 덥기는 덥지만요."하고 나는 말했다.
"오래 이곳에 계셨지요, 당신? 아주 새까맣게 그을렸군요."
"9일쯤 있었죠."
"정말 잘 태웠군요."하고 그녀는 감탄하듯이 말했다.
"나는 어제 저녁에 막 도착했어요. 도착했을 때는 마침 소나기가 와서 서늘했는데, 이렇게 더워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너무 갑자기 몸을 태워 버리면 나중에 괴롭습니다. 이따금 그늘로 돌아가야 해요."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군인 가족 전용의 코티지에 묵고 있어요."하고 그녀는 나의 충고를 무시하고 말했다.
"오빠가 해군 장교여서 초대해 주었어요. 해군도 나쁘지 않더군요. 생계나 실직의 염려도 없고 서비스는 확실하고. 내가 학생 때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어서 집안에 직업군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는데, 세상이란 변하는 건가 봐요."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해군이라면 내 전 남편도 해군 출신이었지요. 해군 항공대, 제트기 파일럿. 저어, 당신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이라고 아세요?"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해군을 제대하고 그곳의 파일럿이 되었죠. 나는 당시에 스튜어디스였는데, 그래서 사이가 좋아져서 결혼했구요, 나인틴 세븐티..... 몇 년이었더라, 아무튼 6년 정도 전의 일이죠. 뭐, 흔히 있는 이야기지만요."
"그렇습니까?"
"그래요. 에어라인의 기내 스태프는 근무시간이 아무튼 되는 대로여서 아무래도 동료 중에서 짝을 찾게 되는 거죠. 일반인들과는 사고방식이 조금 다른 일이니까 말예요. 그래서 내가 결혼해서 일을 그만두어 버리자, 그는 다시 다른 스튜어디스를 찾아내 버렸던 셈이죠. 그런 일도 흔히 있죠. 스튜어디스에서 스튜어디스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거지요."
"지금은 어디 살고 계십니까?" 하고 나는 화제를 바꿨다.
"로스앤젤레스."하고 여자는 말했다.
"당신 로스에 가본 적 있어요?"
"노."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로스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아버지 일 관계로 솔트레이크 시티로 옮겨 갔어요. 솔트레이크 시티에 간 적은?"
"노."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곳 갈 데가 못돼요. 하이스쿨을 나와서 플로리다의 대학으로 갔고, 대학을 나와서 뉴욕 시티로 갔고, 결혼해서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이혼하고 다시 로스앤젤레스.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와 버린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처럼 아주 살찐 스튜어디스를 난 이제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쩐지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체격 좋은 레슬러 같은 스튜어디스나 팔이 굵고 엷게 콧수염이 난 스튜어디스라면 몇 번인가 본 일이 있지만, 뒤룩뒤룩 살찐 스튜어디스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그래도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은 그런 일은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살이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분명히 살이 빠진다면 나름대로 매력적인 여성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추측했다.
아마 그녀는 결혼해서 지상에 내려와서부터 급격히 비행선처럼 살이 찌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녀의 팔과 다리는 마치 과장된 이노센트 아트의 인물상같이 두리 뭉실 하얗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렇게 살이 찐다면 어떤 느낌이 드는 걸까, 하고 나는 잠깐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더위 탓에 난 거의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상상력에 적합한 기후와 적합하지 않은 기후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디서 묵고 있나요?"하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나는 내가 묵고 있는 코티지 호텔을 가리키며 알려 주었다.
"혼자 왔나요?"
"아뇨."하고 말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내와 함께입니다." 여자는 생긋 미소 짓더니 머리를 약간 갸우뚱했다.
"신혼여행?"
"결혼해서 6년입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흐음." 하고 여자는 말했다.
"그런 나이로는 보이지 않아요, 당신." 나는 어쩐지 어색해져서 자세를 바꾸고, 다시 해변으로 눈을 돌렸다. 붉게 칠해진 감시대 위에는 여전히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수영하고 있는 사람의 수도 적었기 때문에 라이프 가드(구조원)인 청년은 따분해서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가 없어지면 그 후에는 <라이프 가드 부재, 각자의 책임으로 수영해 주십시오>라는 팻말이 걸리게 된다. 라이프 가드는 새까맣게 탄 과묵한 청년이었다.
맨 처음 해변에 나왔을 때 나는 그에게 "이 주변에 상어는 있소?"하고 물어 보았다. 그는 잠시 가만히 내 얼굴을 보고 나서 양 손을 80센티 정도 벌려 보였다. <있어서 이 정도>라는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혼자서 헤엄쳤다.
휠체어 모자의 모습도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늘 앉아 있는 벤치에는 흰 반소매 셔츠를 입은 노인이 혼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아직 발리볼을 계속하고 있었다. 물가에서는 작은 어린애들이 모래성을 만들거나, 서로에게 물을 끼얹거나 하며 놀고 있었다. 그 주위에서 파도가 미세한 거품이 되어 부서지고 있었다.
이윽고 앞바다로부터 2대의 올리브 그린의 헬리콥터가 모습을 나타냈고, 마치 중대한 보고를 전하는 그리스 비극 속의 특사처럼 엄숙하게 우리 머리 위를 굉음과 함께 지나가더니 내륙 쪽으로 사라져갔다. 그동안 우리는 말없이 그 거대한 비행체를 가만히 눈으로 좇고 있었다.
"저어, 저런 식으로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우리들 모습이 굉장히 행복하게 보이지 않을까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주 평화스럽고, 즐거운 것 같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요. 흡사, 그래요......가족사진 처럼요. 그렇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적당한 기회를 잡아 그녀에게 작별을 고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물가까지 헤엄쳤다. 나는 헤엄치고 있는 동안 줄곧 아이스박스안의 차가운 맥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도중에 헤엄을 멈추고 부표 쪽을 돌아보니,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가볍게 손을 들어 주었다. 멀리서 보니, 그녀는 진짜로 돌고래 같아 보였다. 그대로 아가미가 생겨서 바다 밑으로 돌아가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방으로 돌아와 짧은 낮잠을 자고 6시가 되자, 식당에서 언제나처럼 저녁을 먹었지만, 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식당에서 돌아올 때도 언제나 와는 달리 그들의 방문은 꽉 잠겨 진 채였다. 젖빛 유리로 작게 끼워 넣은 창에서 방의 불빛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모자가 아직 거기에 체류하고 있는지 어떤지,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 두사람은 벌써 떠나 버린 걸까?"하고 나는 아내에게 물어 보았다.
"글쎄요, 어떻게 된 걸까요? 알아채지 못했어요. 원래가 조용한 사람들이고, 특별히 주의도 하지 않았으니 모르겠어요."하고 원피스를 개어 슈트케이스에 채워 넣으면서 흥미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왜 그러죠?"
"아니, 그냥. 신기하게 두 사람 모두 해안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서 조금 마음에 걸렸을 뿐이야."
"그럼 아마 이미 떠난 거겠죠. 그 사람들도 꽤 오래 여기에 묵고 있었던 것 같으니까요."
"그렇겠군."하고 나는 말했다.
"모두 언젠가는 어딘가로 떠나가는 거예요. 언제까지나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것도 아닐 테고요."
"그거야 그렇겠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슈트케이스의 뚜껑을 닫고 그것을 도어 옆에 놓았다. 슈트케이스는 어떤 그림자처럼 그곳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의 휴가는 이윽고 끝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눈을 떴을 때, 바로 베개 옆의 트래블 워치(여행용 시계)로 눈을 돌렸다. 녹색의 야광 페인트를 칠한 바늘은 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뜬 것은 이상하게 격한 심장의 노동 탓이었다. 마치 무언 가에게 몸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상태였다. 심장 부근으로 눈을 돌리니 가슴살이 실룩실룩하고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이 밤눈으로도 분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심장이 월등하게 건강해서 맥박수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적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편이고, 한 번도 병을 앓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렇듯 어떤 발작처럼 가슴이 흥분된다는 것은 어쨌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침대에서 카펫 위로 내려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등뼈를 꼿꼿하게 세우고, 깊은 숨을 들이쉬고 그리고 내뱉었다. 어깨의 힘을 빼고 배꼽 주위로 신경을 집중했다. 몸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근육 스트레칭 같은 것인데, 몇 번인가 그것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조금씩 심장의 고동은 약해지고, 이윽고는 여느 때처럼 어지간히 주의하지 않으면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렴풋한 작은 넘실거림으로 후퇴해갔다.
아마 수영을 너무 많이 한 때문이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강한 햇살, 피로의 축적-그러한 것이 얼마간 쌓여 내 몸을 한순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리라. 나는 벽에 기대어 다리를 곧게 뻗고 손발을 다양한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어디에도 이상은 없다. 심장의 움직임도 완전히 평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코티지의 방의 카펫 위에서 나는 스스로가 이미 청년기를 지나 버렸고, 이미 체력적인 퇴조기의 프로세스(과정)에 발을 들여 놓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확실히 아직 젊긴 했지만, 그것은 그늘 하나 없는 젊음은 아니었다. 그 사실은 불과 몇 주일 전에 단골 치과의사로부터 지적받은 터였다. 치아에 관해서라면 앞으로 이제 닳아 없어지거나 흔들리거나 빠져갈 뿐인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고 그 의사는 말했다. 그 점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당신에게 가능한 일은 그것을 조금이라도 늦추게 하는 것뿐입니다. 막을 수는 없습니다. 늦추게 하는 것뿐입니다.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흰 달빛 아래 아내는 푹 자고 있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언제나 대개 그녀는 그렇게 잔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파자마를 벗고 새 쇼트 팬츠와 T셔츠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던 와일드 터키 포켓 병을 포켓에 쑤셔 넣고, 아내가 깨지 않게 살짝 도어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밤의 대기는 선뜩하고 지표에는 젖은 풀입 냄새가 아지랑이처럼 떠돌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공동의 바닥에 서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달빛이 꽃잎이랑 커다란 잎사귀랑 잔디 정원을 낮과는 전혀 다른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필터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처럼 어떤 것은 실제 이상으로 선명하게 빛났고, 또 어떤 것은 생기를 읽은 회색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졸립지는 않았다. 도대체 애초부터 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내 의식은 차가워진 도자기처럼 깨어 있었다. 나는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코티지의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았다. 부근은 고요해서 파도 소리 외에는 귀에 닿는 소리가 없었다. 그 파도 소리도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멈춰 서서 포켓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 그대로 입에 대고 마셨다.
코티지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나는 달빛 아래에서는 얼음이 갈린 둥근 연못 같아 보이는 잔디 정원의 한가운데를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보았다. 그리고 허리 높이만큼의 길이인 정원수 숲을 따라서 걸었고, 작은 계단을 올라가서 트로피컬(열대지방) 스타일의 가든 바로 나아갔다.
나는 매일 밤 이곳에서 보드카 토닉을 두 잔씩 마셨는데, 물론 바는 이미 닫혀 있었다. 정자풍의 칵테일 스탠드에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정원에 한 다스 가량의 둥근 테이블이 흩어져 있을 따름이었다. 곧게 접혀진 테이블의 파라솔은 마치 날개를 접은 거대한 밤의 새처럼 보였다.
휠체어에 앉은 청년이 그런 테이블 위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서, 혼자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휠체어의 금속이 흠뻑 달빛을 빨아들여 얼음 같은 흰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것은 마치 밤을 위해 설치된 특수한 목적을 지닌 정밀한 금속기계 처럼 보였다. 차바퀴의 스포크(바퀴의 살)는 이상하게 진화한 야수의 이빨처럼 어둠 속에서 불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가 외톨이로 있는 것을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극히 자연스럽게 그의 모습과 그의 어머니의 모습을 일체화해서 생각하게끔 되었으므로, 그가 혼자서만 있는 것을 보니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광명을 목격한 것 자체가 예의를 잃은 행위인 것 같은 느낌조차 들었을 정도였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오렌지색의 알로하셔츠를 입고 있었고, 언제나와 같이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 그대로의 자세로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망설이다가 결심을 하고서, 가능한 한 그가 놀라지 않도록, 그의 시야에 들어갈 듯한 방향에서부터 천천히 그 쪽 방향으로 걸어갔다. 내가 2, 3미터 거리까지 다가가자, 그는 이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언제나처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하고 나는 밤의 고요함에 걸맞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하고 그도 작은 소리로 인사를 되돌렸다.
나는 그의 옆 테이블의 가든 체어를 빼내 거기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과 대체로 비슷한 방향으로 눈을 주었다. 해안에는 낮고 들쭉날쭉한 바위들이 죽 펼쳐져 있고, 거기에 그다지 크지 않은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파도는 바위 사이에서 나풀거리는 프릴(여성복 따위의 주름 장식)같이 하얗게 튀면서 빠져나갔다. 가끔 그 프릴의 형태가 미묘하게 변화했지만, 파도의 크기 그 자체는 자로 잰 듯 항상 똑같았다. 시계의 진자같이 단조롭고 나른하게 이렇다 할 특징도 없는 파도였다.
"오늘은 해안에서 만나지 못했습니다만."하고 나는 테이블 너머로 말을 걸어 보았다.
그는 가슴 위에서 손을 깍지 끼고 내 쪽을 향했다.
"예 그렇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 뒤에 한동안 그는 말없이 조용하게 숨을 쉬었다. 마치 자고 있는 듯한 숨결이었다.
"오늘은 죽 방에서 쉬었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실은, 어머니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태라고 해도, 몸의 상태가 구체적으로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요컨대, 정신적인 것입니다. 신경적이라고나 할까요, 신경이 곤두선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의 불룩한 부분으로 몇 번인가 뺨을 비볐다.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뺨에는 수염이 돋은 흔적이 없이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반들반들했다.
"하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어머니는 지금은 이미 푹 자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경우는 제 다리와는 달라서 하룻밤 자면 낫습니다. 물론 완치할 수는 없습니다만, 일단은 현상적으로는 낫습니다. 아침이 되면 건강해집니다."
나는 20초인가 30초인가 1분인가,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테이블 밑에서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서 떠날 때를 적당히 가늠했다. 나는 늘 떠날 때를 적당히 가늠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 성격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려고 하기 전에 그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따분하시겠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건강한 사람에게 병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일일 테죠." 그렇지 않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이것저것 모두 한 치의 틈도 없이 건강한 사람이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죠,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병이 나타내는 방식이라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원인은 하나이고, 결과는 무수합니다. 마치 지진과도 같습니다. 방출된 에네르기의 성질은 같습니다만, 그것이 나오는 장소에 따라 돌연 그 지상 레벨에서의 현상은 바뀝니다. 섬이 하나 생기기도 하거니와, 섬이 하나 가라앉아 버리는 일도 있지요."
그는 하품을 했다. 그리고 하품을 다 하고 나서 "실례했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는 매우 피곤해서 지금이라도 깊이 잠들어 버릴 것같아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슬슬 방으로 돌아가서 쉬는 편이 낫지 않냐고 말해 보았다.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하고 그는 말했다.
"졸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전혀 졸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하루에 4시간 정도 자면 충분하고, 그것도 새벽녘밖에 자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에는 대개 항상 이곳에서 멍하니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 위의 재떨이를 손에 쥐고 그것을 뭔가 아주 소중한 듯이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경우는 뭐랄까-신경이 곤두서게 되면 얼굴의 왼쪽 절반이 점점 굳어지는 것입니다. 차가워져서-입이라든지, 눈이라든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기묘하다고 하면 기묘한 증상이지요. 그러나 그런 것을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인 건 아닙니다. 그것이 특별히 뭔가 치명적인 것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뿐인 증상입니다. 자고 나면 낫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가 이런 얘기를 한 걸 어머니에게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자신의 몸에 관해 얘기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물론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게다가 우리는 내일 아침에는 이곳을 떠나니까 말씀 드릴 기회도 이제는 없을 겁니다."
그는 포켓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고, 그 손수건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고는 무언가에 생각을 집중시키려는 듯이 한동안 눈을 감았다.
마치 어딘가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 같은 침묵이 잠시 동안 계속되었다.
아마 그의 기분이 상승하거나 하강하고 있는 걸 거라고 나는 상상했다.
"그것 참 아쉽군요."하고 그는 말했다.
"유감이지만, 일이 기다리고 있는 처지라서 말입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돌아갈 장소에 따라서겠지요."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 쪽은 이곳에 체재한 지가 오래되셨습니까?"
"2주일-가량 됩니다. 정확히 며칠 째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그 정도쯤 됩니다." 앞으로 더 오래 있을 것인가를 나는 물어 보았다.
"글쎄요."하고 그는 말하고 나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1개월이 될지, 2개월이 될지, 뭐 되어가는 형편에 따라서겠지요. 저는 모른다는 것은,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님의 남편이 이곳 호텔의 주식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라서 우리는 아주 싸게 묵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제 부친은 타일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누님의 남편이라는 사람이 사실상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그 매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걸 제 마음대로 취사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게다가 제가 싫어한다고 해서, 그 매형이 정말로 기분 나쁜 사람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요.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란, 때때로 아주 너그럽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눈을 감았다.
"어쨌든, 그는 많은 타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맨션 현관에 사용하는 것 같은 고급스런 타일입니다. 그리고 여러 회사의 주식도 가득 갖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수완가입니다. 제 아버지도 그렇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제 가족 말입니다-건강한 인간과 건강하지 않은 인간, 효율적인 인간과 비효율적인 인간으로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결과로 그 밖의 기준이라는 것이 어쩐지 불명료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쪽 인간이 타일을 만들거나 재산을 솜씨 좋게 운용한다거나 탈세한다거나 해서, 건강하지 않은 쪽의 인간을 부양한다는 것입니다. 시스템으로서는, 그 기능성 나름으로서는 상당히 잘 되고는 있습니다만." 그는 웃고 나서, 재떨이를 테이블 위로 돌려놓았다.
"모두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기에 1개월 있어라, 여기에 2개월 있어라, 하고요. 그런 사정으로, 저는 비가 내리는 것처럼 저쪽에 가기도 하고 이쪽에 가기도 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와 어머니 말입니다만."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하품을 하고 해안으로 눈을 돌렸다. 변함없이 파도가 기계적으로 바위에 부딪히고 있었다. 하얀 달은 바다의 훨씬 위쪽에 떠 있었다. 나는 시간을 보려고 손목으로 눈을 돌렸지만, 손목시계는 없었다. 방의 나이트 테이블 위에 놔두고 잊고 온 것이다.
"가정이라는 것은 어쩐지 기묘한 것입니다. 그것이 잘 되어가든, 그렇지 않든 말이지요."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당신도 가정이 분명히 있으시겠지요?" 있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라고 나는 말했다. 아이가 없는 부부를 가정이라고 불러도 좋은지 어떤지 나는 잘 알 수 없다. 그것은 끝까지 따져 본다면, 어떤 전제를 지닌 계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맞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가정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하나의 기치 같은 존재입니다. 많은 일들이 저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중심으로 작동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 말의 의미 아시겠습니까?" 알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결핍은 보다 고도의 결핍으로 향하고, 과잉은 보다 고도의 과잉으로 향한다는 것이, 그 시스템에 대한 저의 테제입니다. 드뷔시가 자신의 가극 작곡이 지지부진한 것을 표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창조해 낸 무를 뒤좇느라 세월을 보냈다>라고 말이지요. 제일은 이른바, 그 무를 창조해 내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 후로는 말을 하지 않고, 다시 그의 불면증적인 침묵 속으로 잠겼다.
시간만큼은 충분히 있었다. 그의 의식은 아주 먼 변경(邊境)을 헤맨 후에 다시 돌아왔지만, 돌아온 지점은 출발점과는 조금 빗나가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포켓에서 위스키 병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괜찮다면 조금 마시지 않겠습니까? 글라스는 없지만." 하고 나는 말해 보았다.
"아닙니다."하고 그는 아주 조금 미소를 지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수분이라고는 거의 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관 마시고 혼자 드십시오. 다른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을 보는 것은 싫어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병으로부터 입 안으로 위스키를 흘려 넣었다. 위 속이 따뜻해지고,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온기를 맛보았다. 그는 그런 내 모습을 옆 테이블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어, 이상한 것을 여쭤 보는 것 같습니다만, 당신은 나이프에 관해 잘 아십니까?"하고 갑자기 그는 말했다.
"나이프?"하고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예. 나이프 입니다. 물건을 자르는 나이프. 헌팅 나이프(사냥용 칼) 말입니다."
헌팅 나이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다지 크지 않은 캠핑용 나이프나 스위스제 군용 나이프라면 써본 적이 있다,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나이프에 관해 상세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손으로 휠체어의 바퀴를 돌리면서 나의 테이블로 다가와 테이블 너머로 나와 마주했다.
"실은, 당신에게 좀 보여 드리고 싶은 나이프가 있습니다. 저는 2개월쯤 전에 이것을 손에 넣었습니다만, 저는 이런 것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서,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그것이 어느 정도의 물건인지, 대충이라도 좋으니까 알고 싶은 것입니다. 만약 폐가 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폐가 되진 않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포켓에서 길이가 10센티 정도의 나뭇조각을 꺼내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활과 같이 굽은 형상으로 대단히 아름다운 커브를 가진 엷은 갈색의 나뭇조각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자, 탁 하는 단단하고 무게감 있는 소리가 났다. 접는 식의 소형 헌팅 나이프였다.
소형이라고 해도 상당한 폭과 두께가 있는 꽤 훌륭한 것이었다. 헌팅 나이프라고 하면, 일단 곰의 가죽을 벗길 정도로는 만드는 것이다.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고 청년은 말했다.
"저는 이것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거나, 혹은 자신에게 상처 입히거나 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단지, 저는 어느 날 갑자기 몹시 나이프라는 것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TV나 소설에서 나이프를 보거나 읽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자기 소유의 나이프가 무슨 일이 있어도 갖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이것을 사오게 했습니다. 스포츠용품점에서 사오게 했습니다. 모친에게는 물론 비밀이며, 그 사람 외의 누구도 내가 나이프를 포켓에 넣어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모릅니다. 저만의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테이블 위에서 나이프를 집어 들어 마치 미묘한 무게를 가늠하는 것처럼 잠시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다가, 이윽고 테이블 너머로 내게 건넸다. 나이프는 아주 묵직한 무게감이 있었다. 나뭇조각이라고 보였던 것은 놋쇠를 도려낸 표면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나무를 끼워 넣은 것일 뿐으로, 본체의 대부분은 놋쇠와 강철로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무게가 있었다.
"날을 내어 보십시오."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칼자루 윗부분에 사이가 벌어진 우묵한 곳을 누르고 무거운 날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탁, 하는 건조한 소리가 나고 날이 똑바로 고정되었다. 날의 전체 길이는 8센티에서 9센티 정도일 것이다. 날이 고정된 나이프로서 손에 쥐어 보자, 나는 그 묵직한 무게에 새삼스레 놀랬다. 단지 그저 무겁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손바닥에 착 들러붙는 것 같은 기묘한 무게감인 것이다. 조금 힘 좋게 손을 상하좌우로 흔들어 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자체의 무게 탓으로 손잡이는 거의 흔들리지도 않고 손의 움직임에 실로 잘 따라왔다. 손잡이의 커브도 이상적이랄 만큼 손에 잘 익었다.
힘껏 쥐어도 부자연스런 감촉은 전혀 없고, 손가락을 떼었다가도 그것은 정확히 손 안에 수습되었다. 날의 형태도 볼 만한 것이었다. 두터운 강철이 시원스레 깎여 들어가 가운데 볼록한 부분에서 흐느끼는 듯한 매끄러운 라인을 그리고 있었고, 등 부분에서는 <찌르기>를 위한 거친 톱니형으로 되어 있었다. 생생한 블러드 커터(홈)도 확실히 나 있었다.
나는 달빛 아래에서 주의 깊게 그것을 점검하고 시험 삼아 몇 번인가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디자인과 사용 시의 기분이 일치하는 고급스런 나이프였다. 아마 칼이 드는 정도도 대단할 것이 분명했다.
"좋은 나이프인데요."하고 나는 말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손에 잘 일고 날도 본 바로는 확실하고 밸런스도 좋고 훌륭한 것입니다. 규칙적으로 기름을 쳐 주면 평생 쓸 수 있는 물건입니다."
"헌팅 나이프로 하기에는 너무 작지 않습니까?"
"이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너무 크면 의외로 쓰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날을 시원스런 소리와 함께 접어서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그 날을 꺼내 손 안에서 뱅그르르 솜씨 좋게 한 번 회전시켰다. 마치 곡예 같았지만 손잡이가 무거우니까 그런 것도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마치 총을 조준하듯 한쪽 눈을 감고 달을 향해 똑바로 나이프를 비추어 보았다. 달빛이 그의 나이프와 휠체어를 마치 부드러운 살을 찢고 나온 흰 뼈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게 했다.
"무언가를 잘라 보아 주시겠습니까?"하고 그는 말했다.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 나이프를 손에 쥐고 근처에 있는 야자나무의 줄기에 몇 번인가 찌르고, 나무껍질을 비스듬하게 베어 떨어뜨렸다. 그런 다음에 풀장 옆에 있던 발포(發泡)스티롤의 싸구려 비트판(발장구 연습용 널)을 멋지게 두 개로 갈랐다. 굉장히 날이 잘 드는 칼이었다.
나는 눈에 띄는 주위의 것을 한쪽 끝부터 베어 자르면서, 문득, 점심때 부표 위에서 만났던 살찐 백인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의 희고 부풀어 오른 육체가, 지진 구름처럼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부표며, 바다며, 하늘이며, 헬리콥터가 원근감을 잃고 하나의 카오스로서 나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몸의 밸런스를 잃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조용하고도 천천히 나이프로 허공을 베었다. 밤의 대기는 기름처럼 매끄러웠다. 내 움직임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밤은 깊었고, 시간은 부드러운 물기가 있는 육체 같았다.
"이따금, 저는 꿈을 꿉니다."하고 청년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깊은 굴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처럼 울리고 있었다.
"마치 제 머리의 안쪽에서 기억의 부드러운 살덩어리를 향해 나이프가 비스듬히 꽂히는 꿈입니다. 그다지 아프지는 않습니다. 그저 꽂힐 뿐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것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나중에는 나이프만이 하얀 뼈처럼 남습니다. 그런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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