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

chocohuh 2017. 4. 23. 02:20

도서관은 아주 조용했다. 책이 소리를 전부 흡수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책에 흡수된 소리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물론 어떻게도 되지 않는다. 요컨대 소리가 사라진 게 아니고, 공기의 진동이 흡수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책에 흡수된 진동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어떻게도 되지 않는다. 진동은 다만 단순히 사라져 버렸을 뿐이다. 진동은 어차피 언젠가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영원한 운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운동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만 해도 영원한 운동은 아니다. 다음 주가 없는 이번 주도 있었고, 지난 주가 없는 이번 주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주가 없는 다음 주는... 이제 그만하자. 아무튼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 그리고 도서관은 아주 조용했다. 도서관은 필요 이상으로 조용했다. 나는 새로 산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으므로, 회색의 리놀륨이 깔린 마룻바닥을 걷자 뚜벅뚜벅 하는 딱딱하고 메마른 소리가 났다. 어쩐지 내가 내는 구두 소리 같지가 않았다. 새 가죽 구두를 신으면 자신의 발소리에 익숙해지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대출 코너에는 본 적이 없는 중년 여인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주 두툼한 책인데, 오른쪽은 외국어, 왼쪽은 국어로 씌어진 문장이 인쇄되어 있었다. 같은 문장은 아닌 것 같았다. 좌우의 단락이나 행이 전혀 달랐으며, 삽화도 달랐다. 왼쪽 페이지의 삽화는 태양계의 궤도도(軌道圖)였고, 오른쪽의 것은 잠수함의 밸브 비슷한 금속 부품이었다. 무엇에 대한 책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응, ,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은 책을 달리고 있었다. 눈의 움직임으로 보아 왼쪽 눈으로는 왼쪽 페이지를, 오른쪽 눈으로는 오른쪽 페이지를 읽는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하고 나는 말을 걸었다. 그녀는 책을 옆으로 밀어 놓고 나를 쳐다보았다.

"책을 반환하러 왔습니다" 하고 나는 두 권의 책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한 권은 <잠수함 건조사(建造史)>였고, 또 한 권은 <어느 양치기의 회상>이었다. <어느 양치기의 회상>은 상당히 흥미 있는 책이었다. 그녀는 책의 뒤표지를 넘겨서 기한을 살폈다. 물론 기한 내에 가져왔다. 나는 날짜나 시간은 반드시 지킨다. 그래야 한다고 교육을 받아왔다. 양치기도 그렇다.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양들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워져 버린다.

 

그녀는 익숙한 태도로 대출 카드를 살피고, 내 두 장의 카드를 돌려주었다. 그리곤 다시 곧 독서에 열중했다.

"책을 찾고 있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계단을 내려가서 오른쪽, 107호실"하고 그녀는 짤막하게 말했다.

 

계단을 내려가서 오른족으로 돌자, 정말 107이라고 적힌 문이 있었다. 아주 깊고 어둑어둑한 지하실로, 문을 열면 그대로 브라질로라도 가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이 도서관에 백번도 더 왔었지만, 지하실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아무러면 어때. 나는 문을 두드렸다. 가볍게 두드렸을 뿐인데도 경첩이 빠져 나올 뻔했다. 아주 낡아빠진 문이었다. 나는 경첩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살며시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작고 낡은 책상이 있었고, 그 뒤쪽에는 얼굴에 검버섯이 잔뜩 핀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대머리였고, 도수가 높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어딘지 깔끔하지 못한 대머리였다. 쪼글조글 비틀어진 흰 머리카락이 산불이 난 뒤처럼 어수선하게 두피에 단단히 매달려 있었다. 차라리 전부 면도기로 밀어 버리면 좋을텐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건 물론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어서 오시오. 무슨 용건이오?"하고 노인이 물었다.

"책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쁘시다면 다음번에..."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오, 아니, 아니, 바쁘달 게 있겠소이까,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무슨 책이건 찾아 드리죠. 그래, 어떤 책을 찾으시는 거요?"

"저어,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금 징수 정책을 알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노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옳거니,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금 징수 정책이라..."

 

나는 그 자리가 몹시 어색했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금 징수 정책을 꼭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금 징수 정책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고 문득 생각했을 뿐이다. 그건 삼()나무 화분병(花粉炳)의 치료법이라도 주제라도 상관없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금 징수 정책이라..."하고 노인은 되뇌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렇게 급할 것은 없어요. 그리고 아주 전문적인 사항이니까요, 국회 도서관에라도 가보겠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실없는 소리하지 말게"하고 노인은 화난 듯이 말했다.

"여기엔 분명히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금 징수 정책을 다룬 책이 몇권이나 있으니까,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

 

노인은 방 안쪽에 있는 철제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거기에 선 채 15분이나 노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도중에 몇 번이나 달아날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노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만뒀다. 작고 검은 벌레가 전등갓 뒤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노인은 세 권의 두툼한 책을 안고 돌아왔다. 모두 지독하게 낡아서 겉장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방안에 묵은 종이 냄새가 풍겼다.

 

", 이거"하고 노인은 책을 건넸다.

"<오스만 터키 세금 징수 역사>, 그리고 <오스만 터키 세금 징수 담당자의 일지>, 그리고 또 <오스만 터키 제국 내의 비납세 운동과 그 탄압에 관하여>...어때, 있잖은가?"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나는 그 세 권을 받아 들고, 출구 쪽으로 나가려 했다.

"기다리게, 기다려. 그 책은 세 권 다 대출이 금지된 걸세." 분명 그 책들의 겉장에는 '대출 금지'라는 빨간 표가 붙어 있었다.

"만일 읽고 싶다면 안쪽 방에서 읽고 가도 되네."

"그런데..."하고 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5 12분이었다.

"벌써 도서관도 폐관 시간이고요, 저도 저녁 식사 때까지 귀가하지 않으면 어머니가 걱정하시거든요."

"폐관 시간 같은 건 문제가 안돼. 내가 괜찮다고만 하면 그걸로 되는 거야. ...그런데 내 호의가 싫단 말인가? 여보게,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책들을 찾았지? 운동이라도 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정말 미안합니다"하고 나는 사과를 했다.

"결코 악의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대출 금지'인 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깊은 기침을 하고는, 휴지에다가 가래를 뱉었다. 그리곤 잠시 그걸 바라보고 나서 휴지통 대신 마룻바닥에 놓인 마분지 상자 속에다 버렸다. 검버섯 핀 얼굴이 떨리고 있었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하고 노인은 뱉어 버리듯 말했다.

"내가 자네 나이쯤 되던 시절엔,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책을 읽었단 말일세."

"그럼 한 30분만 읽다가 가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안될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굉장히 걱정을 하시거든요. 어릴 때 개에게 물린 다음부터는, 저의 귀가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거의 광란 상태가 되곤 한답니다. 나머지는 이번 일요일에 와서 계속 읽을게요." 나는 이렇게 힘없이 말했다. 나는 무엇이든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노인의 얼굴이 가까스로 누그러졌다. 나는 안도했다.

 

"이리로 오게나"하고 노인은 철제 문을 열고 나에게 손짓을 했다. 문의 안쪽은 어스레한 복도였다. 낡은 전등 불빛이 먼지처럼 희뜩희뜩했다.

"내 뒤를 따라오게"하고 노인은 복도를 걸어갔다. 기묘한 복도였다. 얼마를 걷자니까 복도는 좌우로 갈라져 있었다. 노인은 오른쪽으로 구부러졌다. 그 바로 뒤로, 마치 개미굴처럼 복도의 양 옆으로 여러 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노인은 별로 살펴보지도 않고 갈림길 중 하나로 들어섰다.

 

나는 세 권의 책을 가슴에 안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채 노인의 뒤를 따랐다. 노인의 발걸음은 보기보다 빨라서 나는 도대체 우리가 몇번째 갈림길로 들어섰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조금 가다간 또 갈림길. 그리고 T자 길.

 

나의 머리는 이제 완전히 혼란스러워졌다. 시립 도서관의 지하에 이런 광대한 미로(迷路)가 있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에서 이런 지하 미로의 건설을 승인할 까닭이 없다. 나는 노인에게 그 점을 질문해 볼까도 했지만, 호통을 당할 것만 같아서 결국 그만뒀다.

 

막다른 데에 또 전과 같은 철제 문이 있었다. 문에는 '열람실'이라는 표찰이 걸려 있었다. 주위는 무덤 가처럼 조용했다. 나의 가죽 구두만이 뚜벅뚜벅 소리를 내고 있었다. 노인은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노인은 윗도리 주머니에서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커다란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그리고 전등 아래 열쇠 하나를 골라내어, 문의 열쇠 구멍에 밀어 넣고 돌렸다. 어쩐지 이상한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자아, 이제 어쩐다?"하고 노인은 잠깐 생각하더니

"안으로 들어가세"하고 말했다.

"하지만 안은 너무 컴컴한걸요."하고 나는 대꾸했다. 노인은 불쾌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등을 꼿꼿이 펴고 내 쪽을 향했다. 갑작스레 노인의 덩치가 커진 것처럼 보였다. 노인의 눈이 저녁녘의 염소처럼 반작였다.

"여보게, 젊은이. 아무도 없는 방의 전등을 하루 종일 켜놓으란 말인가, ? 자네가 나한테 그렇게 명령하겠단 말인가?"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닙..."

"에이, 시끄럽군. 이젠 됐네. 가보게, 어디든 가버려."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로서도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노인은 어쩐지 불길한 존재인 것만 같았으며, 동시에 화통만 터뜨리는 불행한 사람 같기도 했다. 나는 대체로 노인에 관해선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말 곤란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제가 말을 잘못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모두가 같은 말이지. 입으론 무슨 말이나 할 수 있지."

"사실은 제가 한 말과는 달라요. 어두울 때까지 밖에 있어도 괜찮답니다. 쓸데없는 소릴 해서 미안합니다."

"흐응"하고 노인은 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그럼, 안에 들어갈 테지?"라고 말했다.

", 들어가겠습니다"하고 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내 자신의 생각과는 반대로 쉽게 말하고 행동해 버리는 것일까.

 

"안에는 계단이 놓여 있어.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벽의 난간을 꼬옥 잡도록 해"하고 노인은 말했다.

나는 앞장서서 어둠 속을 나아갔다. 노인이 등뒤에서 문을 닫았다. 딸깍 하고 열쇠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왜 열쇠를 잠급니까?"

"규칙이야, 규칙. 윗것들이 그런 규칙을 몇천, 몇만 개나 만들었다구. 나한테 이러쿵저러쿵하면 곤란해."

나는 체념하고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굉장히 긴 계단이었다. 마치 잉카의 우물 같았다. 벽에는 녹슬 대로 녹슨 쇠난간이 붙어 있었다. 한 줄기의 햇살, 한 조각의 불빛도 없었다. 머리에서부터 두꺼운 자루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캄캄절벽이었다.

내 가죽 구두가 뚜벅거리는 소리만이 어둠 속에 울리고 있었다. 구두 소리라도 없다면 내 발인지 아닌지조차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됐어. 거기서 멈춰"하고 노인이 말했다.

나는 멈춰 섰다. 노인은 나를 밀어젖히듯 앞으로 나서더니, 주머니에서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열쇠를 꺼냈다. 그리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아주 캄캄했는데도, 노인은 마치 무엇이나 다 보이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반갑게도 안에서부터 노오란 불빛이 흘러 나왔다. 약한 빛이었으나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문 안쪽에서 양()같은 모습을 한 작달막한 사내가 나와서, 내 손을 잡았다.

 

"어이, 잘 왔소"하고 그 양 같은 사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하고 나는 말했다. 뭐가 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사내는 진짜 양가죽을 푹 뒤집어쓰고 있었다. 손에는 검은 장갑, 발에는 검은 작업 구두, 그리고 얼굴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로부터 붙임성이 있는 두 개의 작은 눈동자가 엿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그 모습은 그에게 잘 어울렸다. 그는 내 얼굴을 얼마 동안 바라보다가 내가 안고 있는 책을 흘낏 쳐다보았다.

 

"자넨 이리로 책을 읽으로 온 건가?"

"그렇습니다."

"정녕 '자네의 의지로' 이리 온 건가?" 양사내의 말투는 어딘지 묘했다. 나는 머뭇거렸다.

"분명하게 대답하게. 자네의 의지로 왔지 않은가. 왜 우물쭈물하지. 이 늙은이한테 창피를 줄 셈인가?"하고 노인이 다그쳤다.

"제 의지로 왔습니다."

"그것 봐"하고 노인이 득의양양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 아직 어린애인걸요."하고 양사내가 노인을 향해 말했다.

"에이, 시끄러워." 노인은 갑자기 양복바지 뒷주머니에서 짧은 버드나무 가지를 꺼내어 양사내의 얼굴을 철썩 갈겼다.

"어서 방으로 데려가라구." 그 말을 들은 양사내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입술 언저리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자아, 가자꾸나."

"어딜 가지요?"

"독서실이지. , 자넨 책 읽으러 왔잖나?"

 

양사내가 앞장을 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 개미굴처럼 꼬불꼬불 꼬부라진 좁은 복도를 걸어갔다. 우리는 한참을 걸어갔다. 오른쪽으로 몇 번을 꼬부라지고, 왼쪽으로 몇 번을 꼬부라졌다. 비스듬한 모퉁이도 있었으며, S자형 커브도 있었다. 그 때문에 출발한 곳으로부터 어느 만큼이나 떨어져 있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방향 확인을 도중에서 단념하고 줄곧 양사내의 펑퍼짐한 등허리만 바라보며 걸었다. 양가죽 옷엔 짤막한 꼬리도 달려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그것이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 이제 다 왔네"하고 양사내가 갑자기 멈춰 서며 말했다.

"잠깐만요, 이건 감옥이 아닙니까?"

"그렇지"하고 양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네"하고 노인이 말했다.

"말이 다르잖아요. 당신이 독서실로 간다고 해서 내가 여기가지 따라온 거 아닙니까?"

"속은 거야"하고 양사내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속였다네"하고 노인이 말했다.

"아니, 그런..."노인이 양복 바지 뒷주머니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꺼내 나의 얼굴을 철썩 갈겼다.

"입다물고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세 권의 책을 전부 읽고 다 암기해 버려. 한 달 후에 내가 몸소 시험을 할 테니까. 틀림없이 암기하고 있으면 여기서 놓아주겠다."

"이런 법이 어딨어요? 한 달 만에 이렇게 두꺼운 책들을 전부 암기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집에선 지금쯤 어머니가..."하고 나는 항의했다.

노인이 다시 버드나무 가지를 내리쳤다. 내가 살짝 몸을 비키자, 그것은 양사내의 얼굴에 맞았다. 노인은 성난 듯이 다시 한 번 양사내를 후려갈겼다. 끔찍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놈을 안에다 쳐넣어" 그렇게 말하고는 노인은 성큼성큼 걸어서 사라져 버렸다.

"아프지 않습니까?"하고 나는 양사내에게 물어 보았다.

"괜찮아. 난 이골이 났으니까. 그보다도 자네를 이 안에 넣어야만해."

"어째 내키질 않는걸요."

"나도 그래. 하지만 뭐, 세상사란 다 그런 거 아니겠나."

"거부하면 어떻게 되죠?"

"내가 또 지독히 얻어맞게 되는 거지."

 

나는 양사내가 가엾어서, 순순히 감옥 속으로 들어갔다. 감옥 속에는 침대와 책상과 수세식 변기가 있었다. 세면대엔 칫솔과 텁이 놓여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굉장히 지저분했다. 치약은 내가 싫어하는 딸기 맛이었다. 무거운 쇠문짝에는 위쪽에 격자 무늬의 감시 창문이 붙어 있었고, 아래쪽에는 음식을 넣어 주는 가늘고 긴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양사내는 책상 위 전기 스탠드의 스위치를 몇 번이나 켰다 껐다 하고 나서, 내 쪽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나쁘진 않지?"

"네에, 그냥..."

"식사는 하루 세 끼, 3시엔 도넛하고 오렌지 주스도 줄게. 도넛은 내가 직접 만든다네. 파삭파삭한 게 아주 맛있어."

"거 참, 고맙군요."

", 그럼 발을 내봐."

 

나는 발을 내밀었다. 양사내는 침대 밑에서 육중한 둥근 쇳덩어리를 꺼내 그 끝에 달린 사슬을 내 발목에 채우고 열쇠로 잠갔다. 그리곤 그 열쇠를 양가죽의 가슴께에 있는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잠갔다.

 

"굉장히 써늘하군요."

", 곧 익숙해질 거야. 이제 저녁밥 갖다 줄게."

"이봐요, 양사내님. 정말로 한 달이나 여기에 있어야 하나요?"

"그래, 그렇다니까"

"한 달 후면 정말 여기서 나가게 해주는 거겠죠?"

"아니지."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얘기하기 곤란해."

"부탁이니 좀 가르쳐 주세요. 집에선 어머니가 걱정하고 계신답니다."

", 결국은 말이지, 톱으로 머리를 잘리게 되는 거야. 그리고 나선 뇌수를 쭉쭉 빨아먹히고." 나는 침대 위에서 머리를 감쌌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나는 조금도 못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걱정 마, 걱정 마. 밥 먹으면 기운이 날 거야"하고 양사내가 말했다.

 

"보세요, 양사내님. 어째서 제가 뇌수를 쭉쭉 빨아먹혀야 하는가요?"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 그건 말야, 지식이 꽉 찬 뇌수란 건 아주 맛있으니까. 그 뭐랄까, 찐득찐득하고 쫄깃쫄깃한데다가 응어리가 알알이 섞여 있기도 하고..."

"그래서 한 달 동안 지식을 꽉 채워 가지고 빨아먹는다 그거군요."

"그런 셈이지." 양사내는 옷에 붙어 있는 주머니에서 세븐스타 담배를 꺼내, 백 엔짜리 라이

터로 불을 붙였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어느 도서관에서나 그렇게들 하고 있다구. 말하자면 자넨 운이 나빴던 거야."

"어느 도서관에서나 그렇게 하고 있다구요?"

"그렇다네. 글세 지식을 대출하는 것만으론 도서관이 손해를 보는거 아닌가. 게다가 뇌수를 다 빨리더라도 지식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이 제법 있거든. 자네만 해도 다른 데선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얻고 싶어서 이리로 온게 아닌가?"

"아닙니다. 그저 순간적인 생각에서 그랬던 거예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왔답니다."

"거 안됐군." 양사내는 딱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서 내보내 주지 않겠어요?"

"안돼, 그건 안된다구. 그런 짓을 했다간, 그땐 내가 지독한 꼴을 당하게 되고 말거든. 정말 지독한 꼴이란다. 전기톱으로 배를 절반으로 잘리고 마니까. 무섭지?"

"정말 무서운 일이군요."

"나도 옛날에 한 번 당한 적이 있었는데 말야, 도로 맞붙는 데에 2주일이 걸렸단다. 2주일이나 말야. 그러니까 자네가 단념해 주게나."

"그럼, 그건 그렇다치고요, 만약에 제가 책 읽는 걸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죠?" 양사내가 벌벌 몸을 떨면서 말했다.

"그런 일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나쁜 말은 안할 테니까. 이 지하실의 또 지하엔 한층 더 지독한 곳이 있단다. 뇌수를 빨리는 쪽이 훨씬 낫다구."

 

양사내가 가버리자 나는 감옥 속에 혼자 남았다. 나는 딱딱한 침대에 엎드려서 한 시간 가량 흑흑 흐느껴 울었다. 푸른 메밀을 넣어 만든 베개가 눈물로 축축이 젖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뇌수를 쭉쭉 빨아 먹히는 것도 싫지만, 한층 더 지하의 한층 더 지독한 곳으로 쫓겨 들어가는 것도 싫었다.

 

시계는 6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다. 집에선 어머니가 몹시 걱정하고 계실 것이다. 밤중이 되어도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어머니다. 언제나 나쁜 것만 상상하거나 텔레비전을 보고 있어나, 그 어느 쪽이다. 어머니는 나의 찌르레기한테 제대로 모이를 주고 있을까?

 

7시에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더니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소내가 손수레를 밀고 방으로 들어왔다. 눈이 아플 만큼 아리따웠다.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 손과 다리와 목은 금세라도 뚝 부러져 버릴 것처럼 가늘고, 길다란 머리카락은 보석을 녹여 넣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누구나 꿈꾸어 보는, 그리고 꿈에서밖에 볼 수 없는 소녀였다. 그녀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아무 말없이 손수레 위의 음식을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나는 얼이 빠진 듯 그녀의 조용조용한 동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요리는 공을 들인 것들이었다. 섬게 수프와 삼치의 샤워 크림, 서양 깨소금으로 무친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포도 쥬스. 그것들을 늘어놓고, 그녀는 손짓으로, '이제 그만 울고 밥을 먹어요.'라고 했다.

"아가씬 말을 못하나요?"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래요, 어릴 때 성대를 못쓰게 되었어요.'

"그래서 양사내의 심부름을 하고 있나 보군요?"

'그래요.' 그녀는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둘로 갈라질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양사내님은 친절한 분이에요. 하지만 할아버지를 굉장히 무서워하고 있어요.'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내리뜨고, 곧 방에서 나가 버렸다. 5월의 바람처럼 가벼운 동작이었다. 문 닫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절반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납덩이를 위장에 밀어 넣는 기분이 들었다. 식기를 치우고 나서 침대에 누워 뒹굴면서,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튼 여기서 빠져 나가야 한다. 도서관의 지하에 이런 미로가 있다니 너무나 잘못된 일이며, 누군가가 누군가의 뇌수를 빨아먹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어머니를 미치게 하거나, 찌르레기를 굶어 죽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여기서 빠져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선, 나로서도 통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문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게다가 가령 이 방에서 빠져 나간다 하더라도, 캄캄한 미로를 어떻게 달아날 것인가.

 

나는 한숨을 쉬고, 또 한바탕 울었다. 나는 마음이 아주 약해서 언제나 어머니와 찌르레기만 생각하고 있다. 어째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필시 개에게 물린 탓일 것이다. 한바탕 울고 나서, 그 아름다운 소녀 생각을 하며 기운을 내기로 작정했다. 하는 데까지 해보자.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양사내도, 아름다운 소녀도, 그다지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았고, 언젠가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나는 <오스만 터키 세금 징수 담당자의 일지>를 손에 들고, 책상에 앉아 읽었다. 기회를 붙잡기 위해선 우선 유순해진 척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원래 아주 유순한 성격이니까. <오스만 터키 세금 징수 담당자의 일지>는 옛 터키어로 씌어진 난해한 책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술술 읽혔다. 게다가 읽은 부분은 하나하나 남김없이 머리 속에 기억되었다.

 

머리가 좋아진다는 건 실로 멋진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해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뇌수를 쭉쭉 빨아먹혀도 좋으니, 비록 한 달만이라도 똑똑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책장을 넘겨 가면서 세금 징수 담당자 이븐(이븐 아르무드 하슐)이 되어-사실은 훨씬 더 긴 이름인데-반달 모양의 칼을 허리에 차고, 세금을 거두기 위해 바그다드 거리를 걸어 다녔다.

 

거리에는 닭 냄시와 담배와 커피 냄새가 흐름을 멈춘 냇물처럼 서려 있었다. 과일 장수는 낯선 과일을 팔고 있었다. 하슐은 조용한 인물로, 세 명의 아내와 다섯 명의 아이가 있었다. 그는 잉꼬 두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잉꼬는 찌르레기 못지 않게 귀여웠다. 하슐인 나는 세 명의 아내와 몇 번인가 사랑의 시간을 가졌다. 이런 일은 어쩐지 좀 이상하다. 9시 반에 양사내가 커피와 쿠키를 가지고 들어왔다.

 

"아이구 이런, 감탄할 일이네. 벌써 공부를 시작했나?"

"그래요, 양사내님. 아주 재미있는걸요."

"거 다행이군. 하지만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커피라도 좀 마시게나. 처음부터 너무 열심히 하면 나중에 힘들어져." 나는 양사내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쿠키를 먹었다. 바삭바삭.

"있잖아요. 양사내님. 뇌수를 빨아먹힌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 그건 생각만큼 나쁘진 않은가 봐. 마치 머리 속에 얽힌 실이 쑤욱 뽑히는 것 같은 느낌이래. 다시 한 번 해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니까 말야."

"허어."

"뭐 그런 거야."

"빨아먹힌 다음엔 어떻게 되죠?"

"나머지 인생을 멍청하게 꿈이나 꾸면서 지내게 되는 셈이지. 고민도 없고 고통도 없지. 초조할 것도 없고. 시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숙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거든. 어때, 근사하지?"

"글세요, 하지만 톱으로 머리를 잘리게 되겠죠?"

"그야 조금은 아프겠지. 하지만 그런 건 잠시면 끝나거든."

"그럴까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어쩐지 너무 간단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소녀를 뇌수를 빨아먹히지 않았나요?" 양사내는 의자에서 20센티미터나 뛰어올랐다. 만들어 붙인 귀가 펄럭펄럭 흔들렸다.

"뭐지, 그 아름다운 소녀라는 건?"

"식사를 갖다 준 여자아이 말예요."

"이상하군. 식사는 내가 가져왔지 않은가. 그때 자넨 쿨쿨 자고 있었어. 나는 아름다운 소녀가 아니란다.“

 

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아아. 이튿날 저녁, 아름다운 벙어리 소녀는 다시 내 방에 나타났다. 그녀는 손수레 위에 저녁 식사를 싣고 왔다. 이번 식사는 트루즈 소시지의 포테이토 샐러드 곁들임과 실로 꼰 팔시와 떡잎 샐러드, 거기에다 주전자에 든 진한 홍차였다. 쐐기풀 무늬의 멋진 포트도, 찻잔도, 스푼도 이상적인 고풍스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천천히 드세요. 남기지 마시구요.' 아름다운 소녀는 손짓으로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생긋이 웃었다. 하늘이

두 조각 날 만큼 근사한 웃음이었다.

"아가씬 도대체 누구요?"

'저는 저일 뿐이에요.' 그녀의 말은 귀에서가 아니라, 내 가슴의 한복판에서부터 들려 왔다.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양사내님은 아가씨라는 존재를 모르고 있던데. 게다가...“

 

그녀는 조그만 입술에 손가락 하나를 갖다 대고, 나에게 입을 다물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명령에 참 잘 복종하는 편이다. 그것은 특수한 능력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었다.

'양사내님한테는 양사내님의 세계가 있죠. 저한텐 제 세계가 있고, 당신한텐 당신 세계가 있듯이오. 그렇죠?'

"그래요"

'그러니까 양사내님 세계에 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곤 할 수 없겠죠?"

"그렇군요. 말하자면 그런 여러 가지 세계가 모두 여기에 한데 뒤섞여 있다, 그 말이군요. 그리고 포개져 있는 부분도 있고, 포개져 있지 않은 부분도 있고..."

'그래요.' 나는 그다지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다. 개에게 물린 이후로 그 기능이 좀 나빠졌을 뿐이다.

'알았으면 어서 식사하세요.'

"아가씨, 밥을 먹을 테니까, 잠시 여기에 있어 주지 않겟어요? 혼자 있으면 굉장히 쓸쓸하거든요."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두 손을 착 무릎 위에 놓고, 내가 저녁밥을 먹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아침 햇살을 받는 유리 장식물처럼 보였다.

"요전번에 아가씨와 닮은 여자아이를 보았어요. 아가씨와 같은 또래고, 똑같이 예쁘고, 아가씨와 비슷한 향기가 났어요"하고 나는 포테이토 샐러드를 먹으며 말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하고 찌르레기를 한 번 만나 주면 좋겠는데, 찌르레긴 정말 근사하거든요." 그녀는 아주 약간 고개를 움직였다.

"그리고 또 어머니도 말예요. 어머닌 나를 너무나 걱정하시거든요. 어릴 때 개한테 물렸으니깐 말예요. 하지만 내가 개한테 물린 것 내 탓이지 어머니 탓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머닌 날 그렇게 걱정하실 건 없는데. 글세 개는..."하고 나는 덧붙였다.

'어떤 개요?'하고 소녀가 물었다.

"커다란 검정 개였어요. 보석이 박힌 가죽 개목걸이를 걸었고, 눈이 초록빛에 다리가 아주 굵고, 발톱이 여섯 개나 있었죠. 귀 끝은 둘로 갈라졌고, 코는 햇볕에 그을은 것처럼 갈색이었어요. 개한테 물린 적은?"

'없어요. 하지만, 이제 그만하고 식사하세요.'

 

나는 잠자코 저녁 식사의 나머지를 마저 먹었다. 음식을 다 먹은 뒤 접시를 치우고, 홍차를 마셨다.

'이봐요, 여기서 나가서 저와 함께 당신 어머니와 찌르레기한테로 돌아갑시다.'

"그래요. 하지만 여기서 빠져 나갈 수가 없어요. 문이란 문엔 전부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바깥은 깜깜한 미로랍니다. 게다가 내가 도망치면 양사내님이 지독한 꼴을 당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뇌수를 빨리는 건 싫겠죠? 뇌수를 빨아 먹히면, 두 번 다시 저를 만날 수 없게 돼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로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너무나 겹쳐 있었다. 뇌수를 빨아먹히고 싶지도 않았고, 아름다운 소녀와 헤어지는 것도 싫었다. 또 캄캄한 어둠도 무섭고, 양사내가 심한 꼴을 당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양사내님도 함께 도망치는 거예요. 당신하고 저하고 양사내님하고 셋이서 도망치는 거예요.'

"그러면 되겠군요. 하지만 언제?"하고 내가 물었다.

'내일요. 내일은 할아버지가 잠을 자는 날이에요. 할아버진 초승달이 뜨는 날 밤밖엔 잠을 자지 않아요.'

"양사내님이 승낙을 할까요?"

'모르죠. 그런 양사내님 자신이 결정할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이제 전 가봐야겠어요. 양사내님께는 내일 밤이 될 때까지 이 일을 말하지 말아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름다운 소녀는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아주 약간만 열린 문 틈새로 훌쩍 모습을 감워 버렸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했을 즈음에 양사내가 도넛과 레모네이드를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잘돼 가나?"

", 양사내님."

"저번에 약속해 두었던 도넛을 가져왔다구. 갓 튀겨 온 거니까 파삭파삭할 동안에 먹는 게 좋지."

"고마워요, 양사내님." 나는 책을 치우고, 도넛을 집어 먹었다. 아닌게아니라, 파삭파삭한 게 아주 맛이 좋았다.

"어때, 맛있지?"

", 양사내님, 이런 맛있는 도넛은 어디에도 없을걸요. 양사내님이 도넛 가겔 차린다면 굉장히 번창할 거야."

", 나도 말야, 그걸 좀 생각해 봤지. 그런 걸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

"틀림없이 할 수 있다구요." 양사내는 아름다운 소녀가 걸터앉았던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 끄트머리에 짧은 꼬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글렀는걸.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이런 이상한 꼴을 하고 있겠다, 이도 제대로 안 닦겠다..."

"제가 도와드리겠어요. 제가 물건을 팔고, 접시를 닦고, 냅킨을 접고, 돈 계산을 하죠. 양사내님은 안쪽에서 도넛을 튀기기만 하면 된답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군"하고 양사내는 쓸쓸한 듯이 말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결국 나는 여기서 줄곧 버드나무 가지로 얻어맞을 것이며, 자넨 얼마 후면 뇌수를 빨아먹힐 게 아닌가...

 

양사내는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쟁반을 손에 들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그만 탈출 계획에 대해 털어놓을 뻔했으나, 아름다운 소녀의 말을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아무튼지 내일이 되면 이런저런 일들이 명백해질 것이다.

 

<오스만 터키 세금 징수 담당자의 일지>를 읽고 있는 중에 나는 다시금 세금 징수 담당자 이븐 아르무드 하슐이 되었다. 나는 낮에는 바그다드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저녁에는 두 마리 잉꼬에게 모이를 주었다. 밤하늘에는 면도칼처럼 가느다란 달이 떠 있었다. 멀리에서 누군가가 부는 피리 소리가 들렸다. 흑인 노예가 방안에 향을 피운 후 조그만 파리채를 들고 나의 둘레에서 모기를 몰아냈다.

 

침대에서는 세 아내 중 한 명인 아름다운 벙어리 소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좋은 달이에요. 내일은 초승달이에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잉꼬에게 모이를 줘야겠는데요"하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잉꼬한테 아까 모이를 주시던데요'라고 했다.

"그래, 그랬던가." 나는 잉꼬 생각만 한단 말이다.

그녀가 옷을 벗고 나도 옷을 벗었다. 그녀의 몸은 미끈미끈했고, 좋은 향기가 났다. 면도칼 같은 초승달빛이 그녀 몸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빛깔을 던지고 있었다. 피리 소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모기장이 쳐진 넓다란 침대 위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침대는 주차장만큼 넓었다. 옆방에서는 잉꼬가 울고 있었다.

'아주 좋은 달이에요. 내일은 초승달이에요'하고 얼마 후에 아름다운 소녀가 말했다.

"바로 그렇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초승달'이라는 말에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하인을 불러 침대에 드러누운 채 수연초(水煙草)를 피웠다.

"초승달이라는 말에는 무엇인지 떠오르는 게 있군"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초승달이 뜨는 밤이 오면, 이 일 저 일이 명백해지지요'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말했다. 확실히 그대로다. 초승달 밤이 오면 이 일 저 일들이 명백해진다. 그리곤 나는 잤다.

 

초승달 밤은 눈이 없는 돌고래처럼 살며시 찾아왔다. 물론 도서관의 지하 깊은 데서는 하늘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깊숙한 블루 잉크의 어둠은 육중한 쇠문짝과 미로를 빠져 나와써 나의 둘레를 소리도 없이 둘러쌌다. 아무튼 초승달 밤이 찾아왔단 말이다.

 

저녁녘에 노인이 독서의 진척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요전번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엔 여전히 버드나무 가지를 끼고 있었다. 그는 나의 독서 진척 상황을 보고 어지간히 만족해 하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나도 좀 기뻤다.

", 꽤나 잘했군"하고 노인은 턱을 빡빡 긁으면서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잘 나가는 것 같군 그래. 탄복할 만한 아이로군."

",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칭창받는 게 아주 좋다.

"얼른 책만 다 읽는다면"하고 노인은 문득 그대로 입을 다물고는 물끄러미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굉장히 오랫동안 노인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인가 외면을 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노인의 한 쌍의 눈과 내 한 쌍의 눈이 무엇인가로 꽈악 붙잡아 매어진 것 같았다. 그러는 중에 노인의 눈이 마구 부풀더니, 방안 벽 전체가 안구의 흰색과 검은색으로 몽땅 덮였다. 나이가 들어 늙고 닳아 흐릿해진 흰색과 검은색이었다. 그러는 동안 노인은 눈 한 번 깜빡 하지 않았다. 이윽고 안구는 썰물이 밀려가듯 줄어들더니 노인의 눈구덩이에 다시금 포옥 걷혀 들어갔다. 나는 눈을 감고 그제서야 숨을 돌렸다.

 

"일찌감치 책을 읽어 버리면 일찌감치 여기서 나갈 수 있지. 그 밖의 것은 생각지 않아도 돼. 알겠나?"

"."

"무슨 불만은 없느냐?"

"어머니와 찌르레긴 잘 있을까요?"

"세상은 별일 없이 흐르고 있다. 모두가 제각각 자기 일을 생각하고, 그날이 오기까지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 너의 모친도 마찬가지, 너의 찌르레기도 마찬가지, 모두 마찬가지란다." 무슨 영문인지 잘 알지 못했으나,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나가고 나서 30분 가량 있다가 아름다운 소녀가 여느 때처럼 살며시 방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초승달 밤이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군요'하고 아름다운 소녀는 조용히 대답한 후 침대 끄트머리에 살며시 걸터앉았다. 초승달 어둠 덕분에 내 눈을 얼얼했다.

"정말 오늘 여기서 나가나요?"하고 나는 물었다. 아름다운 소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주 지친 것 같았다. 얼굴빛이 여느 때보다 창백했고, 맞은편 벽은 흐릿하게 투명해 보였다. 그녀의 몸 속에서 공기가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어디 아파요?"

'조금요. 초승달 탓이에요. 초승달 때가 되면 이것저것이 조금씩 차질이 난

대요.'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그녀는 생긋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걱정없어요. 틀림없이 여기서 빠져 나갈 수 있어요.'

"아가씨는?"

'제 일은 제가 생각하겠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의 일만 생각하세요.'

"하지만 아가씨가 없어진다면 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른단 말이오."

'그런 느낌이 들 뿐일 거예요. 정말이에요. 당신은 강해지고 있고, 앞으로 자꾸자꾸 강해진단 말이에요. 아무한테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해질 수 있어요.'

"그럴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길은 양사내님이 알고 있어요. 저는 반드시 뒤를 쫓아갈 테니, 먼저 도망치세요.' 내가 끄덕이자 소녀는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소녀가 사라지자 나는 그만 쓸쓸해졌다. 이젠 앞으로 그녀를 만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9시 전에 양사내는 도넛을 접시에 가득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어이, 오늘 밤 여기서 도망친다지?"하고 양사내가 말했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죠?"하고 나는 약간 놀라 물었다.

"어떤 여자아이가 가르쳐 주었어. 굉장히 예쁜 아이였지. 이 근처에 그런 여자아이가 있다는 걸 통 몰랐었지. 친군가?"

", ?"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 나도 그런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하고 양사내가 말했다.

"여기서 빠져 나가면 양사내님께도 반드시 친구가 잔뜩 생길 겁니다."

"그러면 좋겠군. 잘되지 않으면, 나도, 자네도 지독한 꼴을 당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래요"하고 나는 말했다. 지독한 꼴이란, 도대체 어떤 지독한 꼴일까? 그러고 나서 우리는 둘이서 도넛을 먹고 포도 주스를 마셨다. 나는 통 식욕이 없었지만 무리를 해서 도넛 두 개를 먹었다. 양사내는 혼자서 여섯 개나 먹었다. 대단한 식욕이었다.

"무슨 일을 하려면 우선 속을 잔뜩 채워야지"하고 양사내가 말했다. 그리곤 굵다란 손가락으로 입가에 묻은 설탕을 닦았다. 입가는 설탕 투성이였다.

 

어디에선가 벽시계가 9시를 쳤다. 양사내는 일어서서 소매를 흔들어 몸에 맞추었다. 출발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방을 나서서, 어둑어둑한 미로 같은 복도를 걸었다. 노인이 깨지 않도록 우리는 발소를 죽여서 걸었다. 나는 도중에 구두를 벗어 복도 구석에다 버렸다. 25천 엔이나 하는 갓 산 가죽 구두를 버리긴 아까웠지만 별수없었다. 결국 잘못은 이런 이상한 곳에 말려든 내게 있었다. 가죽 구두를 잃어버렸다고 어머닌 화를 많이 내실지도 모른다. 뇌수를 빨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버렸다고 하면 어머니가 믿어 줄까? 아니, 절대 안 믿으실 거야. 어머니는 내가 가죽 구두를 잃어버린 걸 얼버무리기 위해 거짓말하는 줄 알게다. 그건 그렇다. 도서관의 지하에서 뇌수를 빨릴 뻔했다는 소리를 도대체 누가 믿으랴? 사실을 말해도 믿어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쇠문짝에 당도하기까지의 긴 노정에서 나는 줄창 그런 것만 생각했었다. 양사내는 내 앞을 잠자코 걸었다. 양사내는 나보다 머리 절반만큼 키가 작았다. 그래서 나의 코끝에서 양사내의 만들어 붙인 귀가 깡충깡충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보세요, 양사내님, 잠깐 구두를 가지러 되돌아가면 안되나요?"하고 나는 작은 소리를 물었다.

"? 구두?"하고 양사내는 약간 놀란 듯이 말했다.

"안된다구, 그런 건. 구두 생각은 잊어버려. 구두보단 뇌수 쪽이 훨씬 더 소중하지 않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구두 생각은 잊었다.

"할아버진 지금쯤 쿨쿨 잠자고 있지만, 저 사람 저래봬도 굉장히 민감하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구."

"."

"도중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큰소리 내면 안된다구. 한 번 저 사람이 잠이 깨어 뛰어온다면, 그땐 내가 자네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거든. 저 버드나무 가지로 얻어맞으면 나는 절대로 저항할 수 없단 말이야."

"특별한 버드나무 가지인가요?"

"글세, 어떨까?"하고 양사내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극히 보통의 버드나무 가지가 아닐까? 나도 잘 모르겠는걸." 나로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보라구"하고 좀 있다가 양사내가 나에게 말했다.

"뭡니까?"

"구두 생각, 이젠 잊었나?"

", 잊었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다시 구두 생각이 났다. 그것은 생일에 어머니가 사준, 아주 소중한 가죽 구두였단 말이다. 또박또박 기분 좋은 소리가 나는 훌륭한 가죽 구두였다. 내가 그걸 잃어버린 탓으로 어머니는 찌르레기를 학대할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찌르레기를 몹시 귀찮게 여기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찌르레기는 전혀 귀찮지 않다. 찌르레는 아주 조용하고 단정하게 있다. 개 같은 것들보다 훨씬 조용하다.

 

.

개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났다. 어째서 다들 개 같은 걸 기를까? 어째서 다들 찌르레기를 기르지 않을까? 어째서 내 어머니는 그렇게도 찌르레기를 싫어할까? 어째서 나는 그런 고급 가죽 구두를 신고 도서관에 왔던 것일까? 우리는 가까스로 쇠문짝에 당도했다. 초승달의 어둠이 약간 짙어진 것 같았다.

 

양사내는 양쪽 주먹에다 하앗, 하고 숨을 불어대고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리고 또 주머니에 손을 밀어넣어 살며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그리곤 내 쪽을 보고 생긋 웃었다.

"조용히 해야 한다구."

"그러죠."

무거운 쇠문짝 열쇠는 덜컹 소리를 내고 벗겨졌다. 작은 소리였으나 몸에 와닿아 육중하게 울렸다. 조금 있다가 양사내는 살며시 문짝을 밀어 열었다. 문짝 저편으로부터 완전한 어둠이 부드러운 물처럼 밀어닥쳐 왔다. 초승달이 공기의 조화를 흐트러뜨리고 있는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반드시 잘될 거야"하고 양사내는 나의 팔을 탁탁 쳤다. 그럴까, 정말 잘될까?

 

양사내는 주머니에서 회중전 등을 꺼내어 스위치를 켰다. 노란 불빛이 계단을 흐릿하게 비추었다. 내가 여기로 올 때에 노인의 안내로 내려온 길다란 계단이었다. 계단 위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미로가 계속되고 있었다.

"보세요, 양사내님."

"뭐야?"

"저 미로의 갈래를 알고 계세요?"

"아마 기억해 낼 수 있을 거지만 말이다,  3~4년 동안 가본 적이 없어서 확실히 말할 순 없지만 뭐 어떻게 알 수 있지 않을까"하고 양사내는 자신이 없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굉장히 불안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새삼스레 무슨 말을 했다고 해서 어떻게 될 것도 아니다. 결국은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양사내와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양사내는 낡은 테니스화를 신고 있었고, 나는-앞에서도 말한 것처럼-맨발이었다. 양사내는 앞장을 서고 회중전등으로 자기 앞쪽만을 비추면서 걸었다. 그래서 나는 캄캄한 어둠 속을 걷게 되어 자꾸만 양사내의 엉덩이에 부딪혔다. 양사내 쪽이 나보다 훨씬 다리가 짧아서 아무래도 걷는 속도가 내가 빨랐던 것이다.

 

계단은 차갑고 미끌미끌하면서 모서리가 둥굴게 닳아 있었다. 몇천년 전에 만들어진 계단이었다. 공기에 냄새는 없었으나, 이곳저곳에서 뚜렷한 층을 이루고 있었다. 층에 따라 밀도와 온도가 달랐다. 내려올 때엔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이다. 아마도 무서워서 거기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가 보다. 때때로 벌레 같은 걸 밟았다. 연하고 물렁한 감촉이며 딱딱하고 투박한 감촉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벌레인 것 같았다.

아무튼 굉장히 기분이 언짢았다. 역시 구두를 신고 왔어야 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계단을 다 오른 후 나와 양사내는 가까스로 숨을 돌렸다. 다리가 저리고 시릴 대로 시려 왔다.

 

"굉장한 계단이군요. 내려갈 땐 이렇게 긴 것 같지 않았는데요."하고 내가 말했다.

"아주 옛날에는 우물이었대. 하지만 물이 마른 후로는 다른 일에 사용하게 됐다는 거야"하고 양사내가 가르쳐 주었다.

"허어"하고 나는 말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뭐 그런 이야기야"

그 다음에 우리는 일어서서 문제의 미로를 향해 나아갔다. 양사내는 최초의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나가 얼마 동안 생각한 다음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왼쪽으로 나갔다.

"문제없나요?"하고 나는 다시 걱정스러워서 물어 보았다.

", 문제없다고. 틀림없어. 이쪽이야" 그래도 나는 불안했다. 미로의 문제점은 끝까지 나가 보지 않고선,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끝까지 나가서 착오였다고 알게 되었을 때엔 이미 손쓰기에 늦다. 그것이 미로의 문제점이다.

 

양사내는 몇 번이나 망설이기도 하고 되돌아가기고 하면서 전진했다. 멈춰 서서 벽을 비빈 손가락 끝을 혀로 핥아 보기도 하고, 귀를 바닥에 갖다 대보기도 하고, 천장에 줄을 친 거미와 중얼중얼 이야기해 보기도 하고, 공기의 냄새를 킁킁 맡아 보기도 했다. 양사내는 보통과는 좀 다른 기억의 회로를 터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 새벽녘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양사내는 가끔씩 포켓에서 회중전 등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2 50. 이제 차츰 초승달의 힘이 약해지니까 조심해야 한다구"하고 양사내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어둠의 밀도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따끔따끔하던 눈의 아픔이 어느 정도 덜해졌다. 나와 양사내는 서둘러 걸었다. 날이 샐 때까지 마지막 문에 당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노인이 잠에서 깨어나 양사내가 없어진 걸 알고 이내 뒤쫓아올 게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끝장이다.

 

"시간 안에 닿을 수 있을까요?"하고 나는 양사내에게 물었다.

", 문제없다구. 나머지 길은 죄다 기억해 냈거든. 걱정하지 말라구. 틀림없이 빠져 나가게 해줄게. 나한테 맡겨 두라구." 분명 양사내는 길을 기억해 낸 것 같았다. 나와 양사내는 꼬부라진 모퉁이에서 모퉁이로 미로를 누비고 빠져 나갔다. 이윽고 우리는 곧은 복도로 나섰다. 양사내가 회중 전등을 돌려대자 복도 끝에 어렴풋이 문이 보였다. 문 틈새로 불빛이 희미하게 흘러 나왔다.

 

"보라구, 내가 말했잖아"하고 양사내는 득의 양양해서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문제없어. 나머지는 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뿐이야."

"고마워요, 양사내님" 양사내는 포켓에서 또 열쇠 꾸러미를 꺼내어 문의 자물쇠를 열었다. 문을 열자 그곳은 도서관의 지하실이었다.

 

전구가 천장으로부터 늘어뜨러져 있었고, 그 아래에 테이블이 있었으며, 테이블에는 노인이 앉아서 이쪽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노인 곁에는 커다란 검정개가 앉아 있었다.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건 초록빛 눈의 개였다. 다리는 굵고, 발이 여섯 개나 있었다. 귀 끝이 둘로 갈라졌고, 코는 갈색이었다. 예전에 나를 물었던 개다.

개는 피투성이가 된 찌르레기를 이빨 사이에 꽉 물로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양사내가 손을 뻗어 내 몸을 받쳐 주었다.

"줄곧 너희들을 기다렸다구. 퍽도 늦었지 뭔가"하고 노인이 말했다.

"선생님,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하고 양사내가 말했다.

"에이, 시끄럽구나"하고 노인이 호통을 쳤다. 그리곤 허리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뽑아 들고, 테이블

을 철썩 때렸다. 개가 귀를 세웠다. 양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자아, 이제 널 어떻게 해줄까?"하고 노인이 말했다.

"자고 있었던 게 아닌가요?"하고 내가 말했다.

"흐응"하고 노인이 비웃듯이 웃은 후

"잔꾀를 부리는구나, 이애가. 누구한테 배웠는진 몰라도 난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너희들이 생각하는 만큼은 꿰뚫어 보고 있단 말이다"하고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잘될 리가 없다. 덕분이 찌르레기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하고 노인은 버드나무 가지로 양사내를 가리켰다.

"넌 싹둑싹둑 베어 찢어서 구덩이에 처넣어 지네의 먹이가 되게 해주마." 양사내는 내 등뒤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다음에 너"하고 노인은 나를 가리켰다.

"넌 개밥이 된다. 심장과 뇌수만을 남기고 온몸을 물어 찢게 할 테다. 살과 피로 방바닥이 질척거리게 될 만큼." 노인은 즐거운 듯이 웃었다. 개의 초록색 눈이 번들번들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개의 이빨 사이에서 찌르레기가 조금식 조금씩 부풀어오르고 있음을 알았다. 찌르레기는 이윽고 닭만큼의 크기가 되어, 마치 잭(작은 기중기)처럼 개의 입을 커다랗게 젖혀 열었다. 개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그땐 이미 늦었다. 개의 입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황급히 버드나무 가지로 찌르레기를 때렸다. 그러나 찌르레기는 여전히 부풀어올라 이번엔 노인을 단단히 벽에다 밀어붙였다. 찌르레기는 어느새 사자만큼 커져 있었다. 그리고 비좁은 방은 찌르레기의 단단한 날개침으로 덮였다.

 

', 이때에 도망쳐야 해요.' 뒤에서 아름다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뒤돌아보았는데, 뒤에

는 양사내밖에 없었다. 양사내도 어이없다는 듯이 뒤를 돌아다보고 있었다.

', 어서 도망치세요.' 다시 한 번 아름다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양사내의 손을 잡고 정면의 문으로 달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뒹굴 듯이 밖으로 나섰다

 

이른 아침의 도서관에는 사람 그림자라곤 없었다. 나와 양사내는 홀을 달려나가 열람실 창문을 뜯어 열고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 이윽고 공원의 잔디밭에 지쳐서 뒹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혼자만 남아 있었다. 양사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큰소리로 양사내를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밤은 완전히 걷히고 아침의 태양이 그 첫 햇빛을 나무들 잎사귀에 던지고 있었다. 양사내는 어딘가로 가버린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아침 식사를 만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잤니?"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하고 나도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침을 먹었다. 찌르레기도 평화로운 듯 모이를 쪼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구두를 잃어버린 것에 관해서도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옆얼굴을 여느 때보다 조금 슬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단지 느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후로 나는 한 번도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거기에 가서 그 지하실 입구를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이제 거기에는 접근하고 싶지 않다. 해질녘에 도서관 건물을 보기만 해도 발이 오그라든단 말이다. 때때로 지하실에 두고 온 새 가죽 구두 생각이 난다. 그리고 양사내를 생각하고, 아름다운 소녀를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어디까지가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나로선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자꾸자꾸 그 지하실로부터 멀어져만 간다.

 

지금도 나의 가죽 구두는 지하실 한 구석에 놓여 있고, 아름다운 소녀는 이 지상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슬프다. 내가 한 일이 정말 옳았는지 어떤지 그것조차도 나론선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지난 주 화요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조용한 장례식이 있었고,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지금 오전 2시의 어둠 속에서 그 도서관의 지하실을 생각하고 있다. 어둠의 안은 아주 깊다. 마치 초승달의 어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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