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매일 달리기 시작한지도 비교적 오랜 시간이 지났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달리기 시작한 것은 1982년 가을, 내가 33살일 때부터 였다.
내가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하기 조금 전에 나는 도쿄의 센다가야 역 근처에 작은 재즈 클럽을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거의 떠나면서 – 사실 잡다한 일로 바빠서 졸업까지는 몇 학점들을 남겨 뒀고, 나는 공식적으로는 학생이었다 – 코쿠분지 역의 남쪽 입구 근처에 작은 클럽을 열었다. 그 클럽은 그곳에서 약 3년을 버텼다. 그러고서 클럽이 있던 건물이 재건축으로 폐쇄되면서 나는 도쿄 중심지 근처의 새로운 위치로 가게를 옮겼다. 새로 옮긴 곳은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 그랜드 피아노와 5인조 연주단이 겨우 들어갈 만한 그런 곳이었다. 가게는 낮 동안은 카페로, 밤에는 술집으로 운영되었다. 우리 가게에서는 꽤 괜찮은 음식도 팔았고, 주말에는 라이브 공연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클럽은 당시의 도쿄에서는 꽤 드문 것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꽤 꾸준한 고객을 맞이하고 돈도 꽤 벌었다.
많은 친구들은 나의 클럽이 곧 망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들은 취미 삼아 운영되는 곳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은 – 그러니까 순진하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장삿속이 별로 없는 –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뭐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내가 장삿속이 밝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실패해서는 안됐기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장점은 오로지 내가 열심히 일하고 많은 것들을 몸으로 때울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트랙을 달리는 경주마보단, 짐수레를 끄는 나귀에 가까웠다. 나는 화이트-칼라 집안에서 자랐고, 사업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내 아내는 가족이 사업을 했고, 그녀의 탁월한 직감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일은 그 자체로 고됐다.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클럽에 있었고, 문을 닫을 때면 녹초가 되었다. 나는 온갖 종류의 고통스러운 경험과 다양한 실망을 겪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을 고용할 만큼 충분한 이익을 내기 시작했고, 끝내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나는 대부분의 은행에서 빌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돈을 빌렸지만 이제는 그 돈도 거의 갚았다. 모든 것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 이를 때 까지는 혹독한 생존에 대한 고민들로 나는 다른 생각은 하나도 할 수 없었다. 비유하자면 내가 가파른 계단에 끝에 올라서야만 열린 공간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떤 문제가 일어나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내가 올라온 그간의 계단을 내려보고, 내 주변을 둘러보고, 내 삶의 다음 무대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거의 갈증을 느낄 정도였다. 나는 더 이상 내가 마냥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고, 상당히 뜬금없게도 나는 소설을 적게 되었다.
나는 그 일들이 일어나던 시점을 콕 집어 이야기할 수 있다.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 30분이었다. 나는 진구 야구경기장의 외야에 홀로 앉아 야구경기를 보고 있었다. 진구경기장은 내가 당시 살던 아파트에서 지근거리에 있었고, 나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팬이었다. 그날은 구름 한 점 없고 따스한 바람이 부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그때는 외야 뒤에 앉을 수 있는 벤치들이 없었고, 그저 잔디가 깔린 언덕이 있었다. 나는 그 잔디 위에 누워, 차가운 맥주를 홀짝이면서 이따금씩 하늘을 바라보고 야구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경기장은 그렇게 붐비지 않았다. 시즌 개막식이었고, 스왈로스는 히로시마 도요카프와 경기를 하고 있었다. 타케시 야수다가 스왈로스에서 피칭하고 있었다. 그는 영리한 커브 공을 던지는 작지만 단단한 피처였다. 그는 손쉽게 첫 번째 이닝의 타자를 아웃 시켰다. 연이은 스왈로스의 1번 타자는 팀에 새로 합류한 어린 미국인 데이브 힐튼이었다. 힐튼은 좌측 페어 라인을 따라 공을 쳤다. 배트의 금이 공을 만나 내는 소리가 구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힐튼은 1루를 지나 2루에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은 나를 충격에 빠트렸다. ‘그거 알아? 내가 소설을 써야겠어!’ 나는 여전히 그 너른 하늘과, 새로 자란 잔디들의 감촉과, 배트가 갈라지는 만족스러운 소리를 기억한다. 그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 내려왔고,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어떤 야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소설을 적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휩싸였다. 나는 내가 무엇을 적고있는가에 대해 분명한 계획은 없었지만, 그저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으리란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집에 돌아와 식탁에 앉아 글을 적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변변찮은 만년필 하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신주쿠의 키노쿠니아로 가서, 원고지 한 단과 5천 원짜리 세일러 펜 하나를 샀다. 작가가 되기 위한 나의 작은 투자였다.
그해 가을, 나는 200장이 넘는 글을 적었다. 이걸 가지고 뭘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나는 여세를 몰아 군조 문예지의 신인작가전에 글을 냈다. 나는 복사본도 만들지 않고 글을 우편에 부쳤고, 설령 내 글이 뽑히지 않아 영영 사라지더라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 빛을 보든 말든, 내가 책 한권을 끝 맞췄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었다.
그해 만성적인 약체였던 야쿠르트 스왈로스는 페넌트 레이스에서 이기고, 일본 시리즈에서 한큐 브레이브스를 꺾었다. 나는 굉장히 흥분했고, 여러 경기를 코라쿤 경기장에서 관람했다. (거의 아무도 스왈로스가 이길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스왈로스의 홈구장인 진구 야구장은 대학 야구가 이미 차지했다.) 실로 아름다운 가을이었다. 하늘은 청명하고 메이지 기념 미술관 앞의 은행나무는 그 어느 때보다 금빛으로 빛났다. 내 20대 마지막 가을이었다.
그해 봄, 내가 군조의 편집장으로부터 수상작에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내가 작품을 낸 것조차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나는 다른 일들로 너무 바빴다. 소설은 군조신인상을 수상하고 그해 여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소설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나는 나도 미처 제대로 알기 전에 내 자신이 새로 떠오르는 신예 작가로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매우 놀랐지만, 나를 알던 사람들은 더욱 크게 놀랐다.
이후 여전히 재즈 클럽을 운영하면서 나는 중간 길이의 두 번째 소설 ‘1973년 핀볼’을 출간했다. 또한 나는 몇몇 단편들과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 몇 개를 번역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 핀볼’은 모두 아쿠타가와 상에 후보로 올랐고, 두 작품 모두 수상에는 실패했다. 혹시나 내가 상을 탔다면 아마 나는 각종 인터뷰와 글쓰기로 클럽을 운영하는 나의 의무가 방해될까 걱정했을 것이다.
3년간 내가 재즈 클럽을 운영하는 동안 – 장부를 적고, 재고를 정리하고, 직원들의 시간표를 짜고, 칵테일을 섞고 요리를 하는 카운터 뒤에 서있고, 꼭두새벽에 가게 문을 닫고 그리고 나서야 나는 집에 돌아와 주방 식탁에 앉아 자기 전까지 글을 적을 수 있었다. 나는 마치 두 사람의 몫의 인생을 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천천히 내 자신이 좀 더 충실한 소설을 적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첫 두 권의 책을 적는 과정을 즐겼지만, 동시에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들도 있었다. 나는 항상 허겁지겁-지금 삼십 분, 이따가 한 시간처럼- 띄엄띄엄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항상 지쳐있고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온전히 글쓰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렇게 난잡한 접근으로 나는 겨우 몇 가지의 흥미롭고 새로운 것을 적을 수 있었고, 결과물은 복잡하고 심오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는 소설가가 되는 환상적인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느꼈고, 내게 허락된 최대한의 기회를 누리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나는 사업을 접고 오로지 글을 적는 것에 집중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 시점에는 재즈 클럽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소설가로 벌어들이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대부분의 나의 친구들은 나의 결정에 완고하게 반대했고, 아니면 최소한 의문스럽게 생각했다. “너 사업이 잘되고 있잖아” 그들이 말했다. “그냥 다른 사람이 운영하도록 맡기고 소설을 쓰지 그래?” 하지만 나는 그들의 조언에 따를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하든 완전히 몰입해야만 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완전히 몰입했지만 실패한다면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어떤 일에 반쯤 걸쳐 두고 실패하게 된다면 나는 내가 분명히 후회할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클럽을 정리했다. 그리고 조금 당황스럽게 소설가로서 시작했다. “나는 그저 한 2년 정도 글만 적고 싶어” 아내에게 설명했다. “만약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어디 다른 곳에 바를 열 수 있어. 나는 아직 어리고 새로 시작할 시간이 있을 거야” 1981년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상당한 부채가 있었지만,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하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나는 그해 겨울 새로운 작품을 적기 시작했고, 자료조사를 위해서 훗카이도로 여행을 갔다. 그 다음해 4월, 나는 ‘양을 쫓는 모험’을 완성했다. 이는 기존 두 작품보다 훨씬 길었고, 보다 넓은 시각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다뤘다. 내가 작품을 완성했을 때, 나는 나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는 좋은 느낌을 받았다. 이제야 나는 밥을 벌어먹는 소설가로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군조의 편집장은 보다 주류의 작품을 찾고 있었고, 그래서 ‘양을 쫓는 모험’은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새로운 책을 좋아했고, 이는 무엇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나의 소설가로서의 진정한 시작점이었다.
#2
내가 본격적인 작가로 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제가 떠올랐다. 나를 어떻게 건강하게 유지할까 의 문제였다. 클럽을 운영하는 것은 지속적인 육체노동을 필요로 했지만, 내가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소설을 적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살이 불어났다. 또한 담배도 하루에 6개씩 과하게 피웠다. 내 손가락은 노란색으로 변했고, 내 몸에는 담배냄새가 베였다. 이런 것들은 내게 좋을 리 만무했다. 내가 소설가로서의 긴 인생을 원한다면, 나는 건강을 챙겨야만 했다.
운동의 일종으로서, 달리기는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 또한 특별한 장비가 필요하지도 않다. 운동을 하기 위해 어느 특정한 장소로 가야할 이유도 없다. 운동화 한 켤레와 좋은 길이 있다면 심장이 터질 때까지 뛸 수 있다.
내가 바를 그만두고 나서, 나는 내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리라 마음먹었다. 아내와 나는 나라시노의 치바현으로 이사했다. 새로 이사한 곳은 당시에는 꽤나 촌구석이었고, 주변에 운동할 만한 괜찮은 곳은 없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자위대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덕분에 길은 잘 관리되어 있었다. 또한 니혼 대학교 주변의 훈련장이 있었고,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에 그곳을 가면 트랙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운동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았고,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멀지 않아 나는 담배도 끊었다. 담배를 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담배를 피우면서 달릴 수는 없었다. 달리고자하는 열망은 담배의 금단증상을 이겨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담배를 끊는 것은 지난 내 삶과의 작별을 상징하기도 했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는 체육시간이나 운동회 같은 것은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은 위에서 내게 강제하는 종류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할 때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또 나는 운동선수도 아니고, 나는 순간 판단을 내려야하는 모든 종류의 운동에 거의 재능이 없었다. 오래 달리는 것은 이러한 나의 성격에 더 잘 맞았고, 이는 어쩌면 내가 일상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달리기를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와 공부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받은 모든 교육과정, 그러니까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나는 누군가 시키는 공부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창피한 성적은 아니지만, 빼어난 성과나 성적으로 칭찬을 받은 적도, 무엇에도 최고였던 적은 없었다. 나는 정규교육과정이 끝난 다음에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나는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무언가 나의 흥미를 끈다면, 나는 혼자서 그것에 대해 공부했고, 나는 새로운 지식을 익히는데 꽤 효율적이었다.
#3
전문적인 작가의 삶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일찍 자서 일찍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클럽을 운영하던 시절에 나는 동이 틀 때까지 잠에 들 수 없었다. 클럽은 12시에 문을 닫았지만, 나는 뒷정리를 하고 영수증을 정리하고, 앉아서 대화를 조금 나누고 쉬기 위해서 술 한 잔 해야 했다. 그 모든 것들을 하고 나선, 당신이 짐작할 수 있듯 해가 뜨기 직전인 새벽 3시 정도가 된다. 지금도 자주 나는 주방에 앉아 글을 쓰면서 동이 트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 자연스럽게 내가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때쯤이 되면 태양은 항상 중천에 떠있었다.
소설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고 나서 아내와 나는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잠에 들어 태양이 뜰 때 일어나기로 했다.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삶을 존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 우리는 만나고 싶은 사람들만을 만나고, 가능한 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보지 않기로 다짐했다. 우리는 그 당시에는 적어도, 이러한 절제된 즐거움을 우리 자신에게 줄 수 있다 느꼈다.
나의 새롭고, 단순한 일상에서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10시가 되기 전에 잠에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쩌면 다른 시간대에서 최고의 상태가 되겠지만, 나의 경우엔 완전히 아침형 인간이다. 아침에 집중할 수 있다. 그 이후엔 나는 집중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운동을 하거나 심부름을 했다. 하루가 끝날 때쯤이면 나는 쉬고, 책을 읽고, 음악에 귀 기울인다. 이러한 패턴 덕분에 나는 27년간 효율적으로 일 해올 수 있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내게 밤 시간을 허락하지는 않았고, 이따금씩 다른 사람의 관계를 문제에 빠트렸다. 사람들은 내가 여러 번 초대를 거절하자 화를 냈다. 그렇지만 그 시점에서 내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특정한 사람들이 아닌, 불특정의 독자들이었다. 나의 독자들은 내가 전작보다 나은 작품을 내놓을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떤 삶의 방식을 취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소설가로서의 의무이자,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였다. 나는 독자들의 얼굴을 보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들과 나의 관계는 온전히 관념적인 것이었지만 나는 꾸준히 그것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라 여겼다.
다른 말로, 당신은 모든 사람을 기쁘게 만들 수는 없다.
내가 클럽을 운영할 때조차도 나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고객들이 클럽에 찾아왔다. 어느 한 손님이 가게를 좋아하고 다시 오겠다고 생각하면 나는 것으로 충분했다. 만약 열 명 중 한 명이 꾸준히 찾아온다면 그 사업은 살아남을 것이다. 이걸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열 명 중 아홉 명이 클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나의 부담을 상당히 경감시켜줬다. 여전히 나는 그 한 명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내 철학을 절대적으로 깔끔하게 정돈하고, 어느 상황에서도 그 철학을 꿋꿋이 지켜내야만 한다.
“양을 쫓는 모험’ 이후에 나는 사업가로서 기른 그 태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 열 명 중 하나에 속하는 나의 독자들은 늘어났다. 그 독자들은 대부분 어리고, 내 새로운 작품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신작이 나오면 출간되자마자 책을 사서 읽어줬다. 이는 내게 매우 이상적인, 적어도 무척 편안한 상황이었다. 나는 내가 적고 싶은 것들을, 그러니까 그 독자들에게 적고 싶은 것을 적었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었다. 내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예상을 뛰어넘어 2백만 권이 넘게 팔렸을 때, 그 생각은 조금 시간이 지나 1987년 즈음엔 조금 바뀔 수밖에 없었다.
#4
내가 처음 달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멀리 뛸 수 없었다. 나는 고작 20분에서 30분 정도 뛸 수 있었다. 짧은 달리기가 나를 헐떡거리게 만들고, 심장을 터지게 만들고,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운동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이웃들이 내 달리기를 보는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하지만 꾸준히 달리기 시작하면서 몸은 내가 달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점차 내 지구력도 늘어났다. 나는 달리는 사람의 몸을 갖췄고, 내 호흡은 보다 규칙적이고, 내 맥박은 안정을 찾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나 거리가 아니라, 내가 매일 실패하지 않고 달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먹고, 자고, 집안일을 하고, 글을 적는 일처럼 달리는 것은 나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면서 나는 점차 달리는 것에 익숙해졌다. 나는 운동용품 가게에 가서 달릴 때 쓰는 기어와 꽤 괜찮은 운동화를 샀다. 나는 스탑워치도 샀고, 뛰는 동안 책도 읽었다.
돌이켜 보았을 때, 내가 건강하고 강한 몸을 타고났다는 것은 나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 이는 25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꾸준히 뛰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줬고, 그동안 여러 경주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부상을 당한 적도, 다친 적도, 아팠던 적도 없었다. 나는 뛰어난 러너는 아니지만 강한 러너다. 이는 내가 자부심을 느끼는 몇 안 되는 재능 중 하나다.
1983년에 나는 처음으로 길거리 경주에 참여했다. 5 Km정도로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슴에 번호표를 달고, 출발선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준비, 시작 땡” 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해보고 나니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해 5월 나는 사마나카 호수 근처의 15km 경주에 참여했고, 6월에는 내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도쿄 황궁 근처를 계속 뛰었다. 나는 총 7바퀴 뛰었고, 총 22.4 마일을 꽤 나쁘지 않은 페이스로 다리는 하나도 아프지 않은 상태로 뛰었다. 마라톤을 뛰어 봐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이후에야 나는 마라톤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25마일 이후라는 사실을 고생 끝에 알게 되었다. 나는 현재 총 26개의 마라톤에 참여했다.
80년대 중반에 나를 찍은 사진을 보면 분명히 달리는 사람의 몸이 아니었다. 나는 충분히 뛰지 않았고, 필요한 근육을 충분히 기르지 못했다. 나의 팔과 다리는 너무 말랐다. 나는 내가 이러한 몸으로 마라톤을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이제는 오랜 달리기로 내 근육들도 완전히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변화하는 내 몸을 보면서 나는 무척 기뻤다. 내가 설령 삼십 대 후반이더라도 나와 내 몸에 여전히 어떤 가능성이 남겨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더 뛸수록 내 잠재력은 더 드러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내 식습관도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채소를 주로 먹었고, 주로 생선을 단백질 섭취의 수단으로 삼았다. 나는 고기를 크게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러한 고기에 대한 불호는 더욱 심해졌다. 나는 밥과 술을 줄이고, 자연 재료들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단것들은 원래 좋아하지 않아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 몸무게가 쉽게 늘어난 것은 위장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서, 내가 몸무게가 느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매일같이 운동을 해야 하고, 내 식습관을 관리하고,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체중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들은 운동을 하거나 식단을 관리할 필요가 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육체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쉽게 몸무게가 늘어나는 사람들은 건강의 적색 경고등이 눈에 보인다는 행운이 따른 사람들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시각을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은 소설가라는 직업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적용된다. 글을 적는 사람들은 –그들이 뭘 하건, 하지 않건- 글을 쉽게 적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축복을 받았다. 어떤 작가들은 솟아나는 물줄기처럼 문장들이 절로 구성되고, 거의 노력을 하지 않고도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나는 이러한 부류의 작가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창의력의 원천을 가져오기 위해, 조각칼을 가지고 돌을 깎아내야 하고, 깊은 구멍을 파내야만 한다. 내가 매번 새로운 소설을 적기 시작할 때마다 나는 또 다른 구멍을 파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종류의 삶을 아주 긴 시간 동안 지속해왔고, 나는 기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바위에 구멍을 내고 새로운 물줄기를 트는데 꽤 능률이 올랐다. 그래서 한 샘물이 고갈될 때 나는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만약 타고난 샘물을 가진 작가들은 어느 날 그들의 재능이 고갈되었을 때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이제 직면해야 한다. 삶은 불공평하다. 하지만 매우 불공평한 가운데에도, 일종의 공정함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5
내가 매일 달린다고 말하면 몇몇 사람들은 놀라는 눈치다. “당신은 의지가 강한 모양이에요”라 말을 한다. 당연히 이렇게 칭찬받는 것은 꾸중을 듣는 것보다는 매우 기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의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매일 뛸 수 있는 것과 내가 의지를 가진 것 사이에는 큰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25년이 넘도록 뛸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내게 잘 맞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최소한 나는 뛰는 것이 괴롭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다.
이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달리기를 권하지 않은 이유다. 만약 누군가 긴 거리를 뛰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그는 스스로 달리기를 시작할 것이다. 관심이 없다면 아무리 달리라고 설득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소설가가 모두에게 적절한 직업이 아니듯 마라톤 역시 분명히 모두를 위한 운동은 아니다. 누구도 내게 소설가가 되라고 추천하거나 제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몇몇은 소설가가 되는 것을 말렸다. 나는 그저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가졌고, 그것이 내가 한 것의 전부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해서 뛰게 될 뿐이다.
달리기가 나와 잘 맞는 것과 별개로 당연히 뛰는 것이 질리고 하기 싫어질 때가 있다. 그러한 날에 나는 뛰지 않을 온갖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올림픽에서 달렸던 토시히코 시코씨와 그의 은퇴 직후에 인터뷰를 하게 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당신 정도의 빼어난 달리기 선수는 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내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싶은 명료한 말로 대답했다. “당연히 맨날 그렇게 느낍니다.”
이를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 질문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설령 그것이 어리석은 질문일지라도 시코 씨 수준의 사람에게서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설령 능력과 의지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는 사람이더라도, 아침에 일어나 운동화의 신발 끈을 묶을 때 같은 것을 느끼는지 궁금했다. 시코 씨의 대답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내 생각에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나는 뛰고 싶지 않은 날에는 항상 내게 같은 것을 묻는다. 너는 소설가로 생계를 꾸릴 수 있고, 집에서 일하며, 일하고 싶은 시간을 정하지 않느냐고. 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열차로 출근하고 지루한 미팅에 앉아있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네가 얼마나 운이 따랐는지 아느냐고. 이러한 것들과 비교했을 때, 동네 한 바퀴를 뛰는 일은 아무 일도 아니지 않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신발 끈을 묶고, 망설이지 않고 뛰기 시작한다. (물론 나는 세상에 매일 뛰는 것보다는 사람이 가득 찬 열차를 타고 지루한 미팅에 가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는 내가 어떻게 달리는 지다. 내가 뛰기 시작했을 때 나는 33살이었다. 여전히 어렸지만 더 이상 청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나이였다. 예수가 목숨을 잃은 나이였고 스콧 피츠제럴드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나이였다. 인생의 갖은 갈림길 같은 나이다. 내가 달리기 시작한 나이였고, 내가 조금은 늦었지만 소설가로서 시작한 나이였다.
'무라카미하루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지만 확실한 행복 (0) | 2017.04.23 |
---|---|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 (0) | 2017.04.23 |
코끼리의 소멸 (0) | 2013.03.22 |
아침부터 라면의 노래 (0) | 2013.03.22 |
잉카의 바닥없는 우물 (0) | 2013.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