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켄싱턴(Kensington) 지역에 위치한 영국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RCA는 영국 그래픽 디자인을 얘기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학교이다. 영국에서 유일하게 디자인과 예술에 특화된 대학원 과정으로써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배출해왔다.
RCA는 다학제적 커리큘럼과 깊이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는 아트 앤 디자인 전문 대학원이며 6개의 학부 아래 24개의 세부 전공으로 구성된다. 대개 2~3년간의 실무 경력이 있는 학생들이 전 세계에서 지원하며 학과과정 중에 협업을 통해 작업을 건설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또한, 학교에서 지원하는 다양한 세미나와 워크숍을 통해 최신 업계 동향과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올해는 첫 졸업생을 배출한 글로벌 혁신 디자인학과(Global Innovation Design)와 2회째를 맞는 정보 경험 디자인학과(Information Experience Design)의 작업이 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글로벌 혁신 디자인학과는 RCA와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Imperial College London)이 함께 만든 전공과정으로 디자인과 공학 기술을 접목한 교육을 통해 세계적인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디자이너 또는 엔지니어를 양성하는 학과이다. 세계적인 안목을 키우기 위해 2년간의 학과 과정 중 일정 기간을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와 일본 게이오 대학(Keio University)에서 공부할 수 있으며 졸업 시 RCA와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두 개의 석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보 경험 디자인학과는 정보를 데이터 시각화, 설치물, 전시 프로그램, 인터페이스와 같이 사용자나 관객이 경험 가능한 형태로 디자인하는 것을 다룬다. 정보를 경험으로 구현하는 데 있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가리지 않고 의도와 상황에 맞는 형태의 결과물을 도출하도록 장려한다.
Ted Wiles, Involuntary Pleasures, MA Design Products
토스터를 작동시키려면 빵이 구워질 때까지 토스터를 꼭 안고 있어야 한다. 시계의 알람을 멈추려면 블루투스가 연결된 막대기를 들고 기지개 켜는 동작을 2분간 반복해야 하고, 걸려온 전화를 받으려면 먼저 거울을 향해 미소를 지어야 한다. 제품에는 가속도계, 압력센서, 표정 인식 센서 등이 내장되어 있어 사용자의 행동 변화를 읽을 수 있다. 테드(Ted)는 가전제품은 쉽고 빠르고 편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사용자의 정서 안정과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제품을 구상했다. 현대인의 생활방식이 점차 개인화되고 가상세계의 소통이 늘어나면서 고립감을 느끼기 쉬운 요즘, 테드의 토스터를 꼭 안고 있으면 왠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질 것만 같다.
Thor Ter Kulve & Rob McIntyre, Canopy Stair, MA Design Products
토르(Thor)와 롭(Rob)은 포르투갈의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에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캐노피 계단(Canopy Stair)를 디자인했다. 당시 묵었던 숙소 주변으로 돌담이 에워싸고 있어 멋진 경관을 즐기려면 숙소 앞 나무를 타고 올라가야만 했다. 나무를 훼손하지 않고 손쉽게 나무 높이 오르는 방법을 고민하던 끝에 디딤판을 나선형으로 연결한 계단 모듈 시스템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캐스트 알루미늄 삼각 받침, 디딤판, 난간, 래칫 스트랩으로 구성된 계단 시스템은 가볍고 신속하게 조립 해체가 가능하며 다양한 조건의 나무에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다.
Xinglin Sun, In Memory of Memories, MA Information Experience Design
커뮤니케이션 학부의 전시 건물인 스티븐 빌딩(Stevens Building)은 빅토리안 양식의 가정집을 개조한 것으로 벽난로나 고풍스러운 장식이 그대로 남아있다. 씽링 선(Xinglin Sun)은 빅토리안 시대에 이곳에 살았던 아이들에 대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고, 관객들이 마치 보물찾기 놀이를 하듯 조각난 이야기를 찾아내어 완성하는 경험을 디자인했다. 스티븐 빌딩의 모형과 함께 비치된 봉투를 열면 지도, 연필, 책자가 들어있다. 책자를 열면 왼쪽 페이지엔 특정 장소의 사진이, 오른쪽엔 빈 페이지가 있다. 지도를 보고 그 장소를 찾아가면 글자가 새겨진 동판이 있어 빈 페이지를 위에 대고 색칠하면 이야기가 빈 종이에 나타난다. 씽링 선의 작업은 주어진 전시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한편, 관객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작품을 함께 완성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Kim Jaegyeong, You Can"t See the Wood for the Trees, MA Information Experience Design
미디어(Media) 혹은 대중매체라는 말 자체에서 드러나듯이 미디어는 나와 내가 보는 세상의 중간에서 매개체의 역할을 맡는다. 과거의 주된 매체가 신문이나 라디오였다면 1990년대에 들어서는 텔레비전, 그리고 현대는 인터넷이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터넷은 누구나 자신의 주관을 자유롭게 펼치고, 공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으나 반면 공신력이 없는 정보들이 난무하는 탓에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현대인들은 자칫 허위정보를 바탕으로 왜곡된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 김재경이 제작한 유리창은 내부가 유리구슬로 채워져 창문 너머의 풍경이 왜곡되어 보인다. 하지만 내부에 투명한 액체를 주입할 시 액체에 잠긴 유리구슬은 시야에서 사라지며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 미디어를 통해 사실 그대로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결국 누군가의 선택과 주관을 거쳐 나에게 전달된 정보이며 그중 일부는 왜곡된 정보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Waichuen Cheung, Metadrift, MA Innovation Design Engineering
와이천 청은 웹 포털 사이트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키워드 검색 방식에서 탈피하여 메타드리프트(Metadrift)라는 직관적이고 유기적인 검색 엔진을 제안했다. 메타드리프트는 데이터를 3D 지도상에 시각화한 것으로 사용자는 정보의 숲을 거닐며 원하는 데이터를 찾을 수 있다. 뚜렷하게 찾고자 하는 정보가 있을 때는 키워드 검색 방식이 효율적일 수 있으나 종종 키워드를 설정하기 어렵거나 정보를 두루 훑어보고 싶은 경우에 적합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와이천 청은 시범적으로 2,000여 개의 테드(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 강연 데이터를 바탕으로 메타드리프트를 구현했다. 비슷한 주제의 강연끼리 밀집시켜 연관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필터를 통해 다른 관심 주제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또한, 접속자가 많은 데이터 주변으로는 하얀 안개가 형성되어 실시간으로 주목할 만한 데이터를 찾아낼 수 있다.
An Seryeong, House, MA Visual Communication
집이라는 제목의 일러스트 시리즈는 한 남자의 집을 묘사하고 있다. 평범한 집안 풍경일까 하다가도 일상적인 물건 사이로 보이는 수술용 장갑, 톱니, 곤충, 인형 머리에 이상함을 감지한다. 연필로 치밀하게 묘사된 집 주인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진다. 안세령의 작품 집은 가상의 범죄자와 그의 집을 그린 것으로 표면상으로는 정상적이고 평화로워 보이나 그 표면 뒤엔 부정하고 비도덕한 일들이 행해지고 있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걸친 모든 허물을 벗고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공간인 집을 모티브로 겉과 속의 양면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Koraldo Kajanaku, Farewill, MA Global Innovation Design
대부분의 사람은 어떻게 살지에 대해서만 고민하지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를 꺼린다. 죽음은 살아있는 모두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내 인생의 마지막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다는 의미가 있다. 코랄도는 유언을 간편하게 남길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 페어윌(Farewill)을 구상했다. 보통 유언은 죽음을 코앞에 두고 내리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만 18세 이상의 정신적 결함이 없는 자라면 누구나 언제든 유언을 남길 수 있다. 재산 분배뿐만 아니라 가족과 지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나 물건, 장례 방식, 온라인 기록 정리 방식, 생명 연장 의료 행위 여부 등 내 삶을 정리하는 총체적인 방식을 결정할 수 있다. 페어윌에 개인 정보를 입력하고 아이디가 생성되면 유언을 기록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다. 자신의 소유물을 사진을 찍어 올리고, 남기고 싶은 말은 말풍선에 입력할 수 있으며 아이튠스 음악 리스트와 같은 무형의 소유물도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적어두어 손쉽게 원하는 사람들에게 배분할 수 있다. 페어윌은 부담 없이 간편하게 유언을 준비하게 해줌으로써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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