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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디자인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가족 대성당

chocohuh 2014. 10. 1. 09:27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지어지고 있는 로마 가톨릭 성당이다. 카탈루냐(Cataluna) 출신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가 설계하고 직접 건축을 책임졌다. 가우디는 1882년부터 40년 이상을 이 교회의 건설을 책임졌으며, 말년의 15년간은 여기에만 매진했다. 1935년 스페인 내전으로 건축이 중단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다시 재개되었다. 1926년 가우디가 죽은 후 미완성 건물 일부와 성당 모형이 스페인 내전 와중에 부서지기도 했다.

 

 

 

 

 

 

 

 

 

 

 

 

 

 

 

가우디의 디자인과 모델은 대부분 스페인 내전 와중에 비극적으로 파괴되었다. 13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형태를 보여주는 이 성당은 기본적인 바실리카(Basilica) 양식으, 라틴(Latin) 십자가의 세 면을 포르티코(Portico 회랑)가 둘러싸고 있다. 동쪽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벽화로 장식한 예수 탄생 파사드가, 서쪽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를 묘사한 수난 파사드, 그리고 정문에서는 어떻게 인간이 신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광 파사드를 볼 수 있다. 머리 위로는 커다란 물렛가락 모양의 종탑이 몇 개나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이 종탑들은 각각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 사도, 복음사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중앙의 누구보다도 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지역 신문에 따르면 2004년 성당을 찾은 사람은 모두 226만 명으로,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과 알람브라 궁전(La Alhambra)을 제치고 에스파냐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건축물이다.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 Antoni Gaudi i Cornet)1852년 레우스(Reus)에서 태어났으며, 부친과 모친은 장인 집안이었다. 전기에 따르면 애늙은이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고향 근처의 옛 유적을 복원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건축 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건축사 자격을 딴 후 시청 산하의 여러 프로젝트를 수주 받으면서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다. 1888년 카사 비센스를 건축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그 후 카탈루냐의 명문가문 코미야스 후작가의 별장을 건축하면서 가우디 평생의 후원자 에우세비 구엘 백작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883년에는 구엘 가의 가문 건축가가 되었으며 이 시점부터 구엘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건축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메리카와 직물산업을 기반으로 한 구엘 가문의 무제한에 가까운 후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 와중에도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답게 다양한 수주가 들어왔으며 구엘 가문과 관련된 작품들 외에도 다양한 건설작업을 하게 된다. 카사 바트요나 카사 밀라 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1918년부터는 평생 동안 건축한 성가족 대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건설에 매진했지만 이런저런 재정문제 등으로 끝을 보지 못하고, 19266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38호 전차에 치여 치명상을 당했다. 운전사는 지저분한 노숙자로 여기며 그를 길 옆으로 팽개치고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으나 꾀죄죄하게 입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3번이나 승차거부를 당한 끝에 4번째 운전사가 겨우 운전했지만, 병원도 2곳이나 거부당해 할 수 없이 빈민들이나 치료받는 열악한 시설을 가진 무상 병원에 놔두고 가버렸다. 신분을 증명할 게 없어 이 병원에서도 방치되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이름을 말하자 비로소 병원 관계자들이 경악하여 가우디의 친구들과 친척에게 연락했다.

 

서둘러 달려온 그들이 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해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며 그대로 남았고 결국 61073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그를 죽게 만든 38호 전차 운전사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 거부한 택시 운전사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 운전사 3명과 그의 입원을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1926612일 사실상 반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가우디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성 가족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묘석에 새겨졌다.

 

ANTONIUS GAUDI

CORNET

REUSENSIS

ANNOS NATUS LXXIV

VITAE EXEMPLARIS VIR

EXIMIUSQUE ARTIFEX

MIRABILIS OPERIS HUJUS

TEMPLI AUCTOR

PIE OBIIT BARCINONE

DIE X JUNII MCMXXVI

HINC CINERES TANTI HOMINIS

RESURRECTIONEM MORTUORUM

EXPECTANT

R I P

 

 

 

 

2026년 완성 예정을 보여주는 시뮬레이션(Simulation) 모형이 공개되었으나, 과연 관광객들의 성금과 입장료만으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이 건축물의 완성이 근래에 가능할지는 미지수이다.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작품

카사 비센스(1879~1888)

성가족 대성당(1883~)

구엘 별장(1884~1887)

구엘 궁전(1886~1889)

성 테레사 수녀원 학교(1888~1890)

카사 칼베트(1898~1890)

벨예스구아르드(1900~1909)

구엘 공원(1900~1914)

미라예스 농장

카사 바트요(1904~1906)

카사 밀라(1906~1910)

 

카탈루냐의 가우디 작품

구엘 술창고

몬세라트 성지 보수공사

팔마 대성당 보수공사

구엘 성지(성당)(1887~1918)

 

스페인의 가우디 작품

엘 카프리초 별장(1883~1885)

아스토르가 주교관(1887~1893)

카사 데 로스 보티네스(1892~18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