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군이 독일에 대한 마지막 공격 태세를 갖추기 전에 서방 연합군은 공중 폭격을 강화했다. 이 공습은 드레스텐에 대한 5차례의 연속 공격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1945년 2월 13~14일 밤 영국 공군은 800대의 항공기를 출격시켰고, 미국 제8공군이 그뒤를 따랐다. 이 공습의 동기는 독일의 동부전선 방어에 중요한 교통 중심지를 파괴함으로써 소련군의 진격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가운데 하나를 거의 다 파괴하고 적어도 3만 5,000~13만 5,000명을 죽이는 데 성공했을 뿐, 붉은 군대에 어떠한 군사적 도움도 주지 못했다.
3월 23~24일 밤 몽고메리는 25개 사단을 이끌고 베젤 근처에서 48km 거리로 뻗어 있는 라인 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했다. 몽고메리가 진격하기에 앞서 3,000문이 넘는 대포가 엄청난 포탄을 퍼부었고, 폭격기의 파상 공격이 이루어졌다. 저항은 대체로 미미했지만 몽고메리는 교두보를 강화할 때까지는 더이상의 진격을 승인하려 들지 않았다.이제 독일 군인과 민간인의 가장 큰 소망은 영국군과 미국군이 되도록 빨리 동쪽으로 진격함으로써, 소련군이 오기 전에 베를린에 도착하여 되도록 많은 독일 영토를 점령해주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자폭 수단으로 공격을 저지하려는 속셈을 드러냈지만, 독일인들 가운데 이같은 의도를 돕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월 19일에 히틀러는 "군은 우리나라 주민을 고려하지 말고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고 선언한 훈령을 내렸다. 독일의 지역 행정관들은 연합군의 진로를 '사막'으로 만들기 위해 '비축되어 있는 모든 식량과 의류'뿐 아니라 '모든 산업 설비와 주요발전소, 상수도 시설 및 가스 공장'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일 군수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 단호한 명령에 반대하자, 히틀러는 "전쟁에 지면 독일 민족도 멸망할 거요. 그러니 국민이 계속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소"하고 받아넘겼다. 이런 냉혹함에 놀란 슈페어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을 버렸다.슈페어는 히틀러 몰래 군부 및 산업계의 지도자들을 찾아가서, 히틀러의 포고령을 실행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4월 25일에 이미 연합군은 베를린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고, 고립과 절망에 빠진 히틀러는 4월 28~29일 밤 정부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고, 4월 30일에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당시 소련군은 그의 벙커에서 8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진격해 있었다.
두 사람의 시체는 정원에서 급히 화장되었다. 히틀러 후임자의 '전략'은 조건부 항복이었고, 소련군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쪽으로 도망치고 있는 독일 민간인과 군인을 되도록 많이 구출하는 것이었다. 항복이 이루어지는 동안, 거의 200만 명에 이르는 독일군이 영국군과 미국군의 통제구역으로 옮겨졌다.
히틀러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인 4월 29일에 조인된 항복문서로 전쟁은 5월 2일 마침내 막을 내렸다. 유럽 북서부에 주둔해 있는 독일군의 항복문서는 5월 4일에 몽고메리의 사령부에서 조인되었다. 전체 독일군을 포함하는 항복문서는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 대표만이 아니라 소련 대표도 참석한 가운데 좀더 엄숙하게 격식을 갖추어 조인되었다. 1945년 5월 8일 자정을 기해 유럽에서의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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