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아직도 연합군을 격퇴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한다는 원칙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1944년말 히틀러는 2번째 '총동원'의 결과 새로 얻은 병력을 모두 서부전선에 집결시켰다. 그는 10월 18일에 독일을 방어하기 위해 '국토방위군'을 편성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여, 16~60세의 건장한 남자를 모두 징집했다.
11월 중순에 서부전선의 연합군 6개 야전군은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 프랑스 제1군과 미국 제7군은 알자스의 라인 강 연안에 이르렀지만, 전선의 다른 지역에서는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 한편 독일은 프랑스에서 간신히 돌아온 병력 이외에 서둘러 이동시킨 예비 병력과 새로 조직한 병력으로 수비를 계속 강화하고 있었다. 독일은 연합국보다 물자가 훨씬 부족했지만, 독일군의 전선강화는 이제 연합군보다 더 빨리 이루어지고 있었다.
1944년 12월 중순 독일군은 대규모 반격을 개시하여 연합군을 놀라게 했다. 독일군은 이 공격을 위해 24개 사단을 끌어모은 다음, 숲이 우거진 아르덴 구릉 지대를 지나 미국군 보병만이 배치되어 있는 가장 취약한 지점으로 이 병력을 수송할 계획을 세웠다. 능숙하고 은밀하게 준비된 이 작전은 1944년 12월 16일에 시작되었다. 이 날은 안개가 끼고 비가 내려, 연합군 항공기가 공중에서 작전을 방해해도 그 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고 독일군은 판단했다.
120km의 전선을 따라 쐐기 모양의 대형을 갖춘 독일군은 8개 기갑사단을 앞세우고 연합군을 기습했다. 다른 부대보다 더 깊이 뚫고 들어온 제5기갑군은 지베와 디낭에 있는 뫼즈 강 도하 지점에서 32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그러나 미국의 분견대는 바스토뉴를 비롯한 아르덴 구릉 지대의 좁은 통로에 갇혀 측면에서 포위 공격을 받으면서도 굳세게 버텼다. 이어서 흔히 벌지 전투라고 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의 돌격은 폭이 좁아진 대신 더 깊어져, 12월 24일에는 연합군 진영 안으로 약 100km나 뚫고 들어와 32km의 전선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때쯤에는 연합군도 이미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날씨가 맑아지자, 5,000대나 되는 연합군 항공기가 독일군과 그들의 보급망을 폭격하거나 기총 소사를 퍼부었다. 연합군 진영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부대는 퇴로를 차단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 돌출부가 잘리지 않으려면 서둘러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 선봉 부대는 1945년 1월 8~16일에 퇴각했다. 이 공격은 연합군에게 작전 차질과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독일군은 이 공격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붓느라 좀더 오래 항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은 12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미국군 사상자수는 7만 5,000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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