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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_歷史

서유럽 해방

chocohuh 2013. 2. 12. 13:49

한편 연합군은 속속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있었다.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는 히틀러의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명령만 아니었다면, 독일군은 센 강까지 후퇴하여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연합군이 그토록 빨리 프랑스를 해방할 수 있었던 것은 히틀러가 어리석었기 때문이었다. 노르망디 전투에 투입된 독일의 많은 기갑부대와 보병 사단은 히틀러의 '후퇴 불가' 명령 때문에 그곳에 묶여 있다가 결국에는 궤멸했고, 대다수는 연합군이 쳐 놓은 덫에 걸려 꼼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뿔뿔이 흩어진 부대는 더이상 저항할 능력이 없었고, 영국군과 미국군의 기계화 부대는 주로 걸어서 후퇴하는 일부 독일군을 곧 따라잡았다.

 

20만 명이 넘는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포로로 잡혔고, 1,200대의 독일 탱크가 전투중 파괴되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서 무서운 기세로 진격하여 9월초에 독일 국경에 접근했을 때, 그들이 독일 심장부로 계속 진격하는 데 장애가 될 만한 조직적 저항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독일 진격은 중지되었다.

 

9월초에 미국군과 영국군의 탱크는 독일보다 20배나 많았고 항공기는 25배 많았으며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을 거의 궤멸시켰으므로 그 여세로 루르 강 유역이나 자를란트 가운데 하나는 독일군한테서 쉽게 빼앗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1944년 11월까지도 여전히 이 두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9월에 연합군의 움직임이 느려진 이유는 최고 정책 입안자들 중 1944년 8월에 독일군이 그처럼 완전히 무너지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독일군이 완전히 무너진 틈을 이용해 독일 내부로 재빨리 쳐들어갈 정신적·물질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수비군을 집결할 시간적 여유를 얻었고, 이것은 독일에 점령된 유럽이나 전후 유럽의 정치 상황에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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