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에 대한 견해가, 어떤 한 사건을 계기로 단 하루 만에 싹 바뀌는 일이 가끔 있다. 그렇게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자주 있었다가는 피곤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잊을 만하면 불쑥 생긴다.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도 있고, 부정적으로 변화하는 것도 있다.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야 물론 긍정적으로 변하는 편이 바람직하기는 한데…….
디나 워싱턴이 그 옛날 '단 하루에 이 얼마나 큰 변화인가(What a Difference a Day Makes)'라는 노래를 부른 일이 있는데, 물론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요. 사랑을 함으로써 주변의 세계가 크게 바뀌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흔히 몸소 체험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이성과 마음을 나눔으로써, 반짝거리는 태양과 바람의 감촉이 어제와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일도 있다.
사랑과는 별 관계없지만, 이전에 이탈리아에 살았을 때 우연히 화가 데 키리코의 회고전 비슷한 것을 근처 화랑에서 하고 있기에 심심한 차에 가서 보았다. 잔뜩 기대를 하고 가슴을 설레며 간 것은 아니었다. 데 키리코에 관해서는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길모퉁이에서 여자애가 굴렁쇠를 굴리고 있거나, 원추형이나 구형의 이상한 인물이 있는, 표현주의 냄새를 풍기는 그림을 몇 가지 알고 있는 정도로 정직하게 말해 별 관심이 없었다. 또 데 키리코라고 하면, 만년에는 매너리즘에 빠져 '자신의 스타일을 복사하여 그림을 양산했다'고 비판 당하고 비웃음을 산 화가이기도 하다.
전시장은 손님이 별로 없어 썰렁했다(마치 데 키리코 자신의 그림처럼). 그 대신 그림은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데 키리코의 그림은 나의 선입견과는 달리 꽤 흥미로웠다. 습작시대부터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척한 성장기, 간신히 자신의 세계를 확립한 성숙기, 드넓은 평지로 나온 듯한, 안정된 원숙기, 그리고 예의 '자신의 복사'라고 비판당하는 시기. 그처럼 시기별로 그림이 죽 전시되어 있어서 데 키리코의 일생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그림을 하나하나 관람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일종의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얼마만큼 눈물겨운 노력을 거듭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하고, 성공을 거두고, 더 나아가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그 나름의 시행착오 끝에 죽음을 맞이하였는지 그 발자취의 성실하고도 절실한 기록이 거기에 있었다.
그야 물론 만년에는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 됐는지도 모른다. 셀로니우스 멍크의 피아노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돌출적으로 독자적인 스타일을 완성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것을 파괴하고 변화하기가 아주 어려워지는 법이다. 하지만 그가 그 상태에 안주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원작이 지니고 있는 무게란, 미술서적 따위에서 보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거기에는 한 사람의 격렬한 일생이 담겨 있었다.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를 따라 '데 키리코 같은 화가가 뭐……' 하고 가벼이 여겼던 나 자신이 상당히 부끄러웠다. 내가 지금까지 본 것은 그가 남긴 방대한 작품의 극히 일부분 그것도 복제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이나 음악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평소 너무 많은 교묘한 '복제품'에 에워싸여 있는 탓에 '원작'이 지니고 있는 격렬함과 거침과 무게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미술관을 나서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 이후 나는 데 키리코의 팬이 되었다. 내가 그때 느낀 '뭔가가 완전히 바뀌는' 근육의 용트림 같은 감각은, 지금도 내 몸에 남아 있다. 사랑만큼 다이내믹하지는 않지만, 이런 하루가 있으면 약간 득을 본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 일은 언젠가도 한번 쓴 적이 있는데, 내가 소설을 쓰고자 마음먹은 '어느 하루'가 있었다. 스물아홉 살 되던 해, 4월의 어느 오후였다. 나는 그때 일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날의 햇살과, 그날의 바람과, 주변의 소리가 어떻게 들렸는지도,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그 때 내 머릿속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반짝 아주 조그만 빛을 발하여, 그래서 나는 '그래, 이제부터 소설을 쓰자'고 생각하였다. '나는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구체적인 계기라든가 근거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나는 그렇다고 인식했을 뿐이다.
그로부터 대충 1년 후, 내가 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소설은 문예지의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나는 부족하나마 작가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나 자신의 의식 속에서는 그야말로 이날 진구 구장의 외야석에서 이미 작가가 되어 이었던 것이다. What a difference a day makes.
지금 돌이켜보면 그 감각은 열렬한 사랑에 빠진 것과 원리적으로 똑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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