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해 사이 서비스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번지면서 서비스 디자인의 대표적인 영역으로 병원 디자인이 주목을 끌고 있다. 사실 현재 국내에서 주목하고 있는 서비스 디자인은 수익 창출을 전제로 한 비즈니스 관점이 지배적인 상업적 디자인에 가깝다. 이런 측면에서 영국의 '매기 암 치유 센터(Maggie’s Cancer Caring Centres)'는 디자인, 건축을 통해 병원(혹은 의료 기관)의 공익적 역할을 보여주는 모범사례로서, 유행처럼 번지는 우리의 상업적 병원 디자인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매기 센터는 암 환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비영리 힐링 센터이다. 항암 치료를 위한 의료 기관이 아니라 이들의 정신적인 고통을 덜어주는 공간, 즉 우리 식으로 하면 요양소와 비슷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요양소'라는 단어를 쓰기엔 그 이미지와 운영 방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요양소의 그것과 너무 달라 '힐링 센터'라는 단어가 더 맞을 듯 싶다. 분명 암 힐링 센터인데, 암 환자뿐만 아니라 암과 관련된 기억이나 상처가 있는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암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 외로움을 달래러 오는 경우도 많으니, 분명 우리의 암 센터와는 의미가 다르다.
프랑크 게리가 지은 Dundee 매리 암 치유 센터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Dundee 매리 암 치유 센터
무엇보다 매기 센터가 갖는 의의는 암 환자들이 집 같은 따뜻한 공간(Space)을 통해, 암의 희생양으로 공포 속에 살기보다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한다는 취지이다. 사실 이는 매기 센터의 설립자 매기 케스윅 젠크스(Maggie Keswick Jencks)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왔다. 부부 랜드스케이프(조경) 디자이너(남편은 유명 건축가 찰스 젠크스)로서 공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매기는 1993년 유방암을 선고 받았다. 투병 중 암에 대한 공포와 그로 인한 가족들의 슬픔을 보면서 그녀는 암 자체보다 암이 주는 우울 바이러스가 오히려 삶의 기쁨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매기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심리적 안정을 주는 프로그램과 암 치료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시설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자신이 입원했던 에딘버러 병원에 ‘암 케어 센터’를 건의하게 됐고, 1996년 에딘버러에 그녀의 이름을 딴 매기 센터가 처음 생겼다. 이후 그녀의 뜻이 이어져 런던 해머스미스 차링 크로스 병원 등 영국 전역에 14개 정도가 생겨났다. 현재 회장이 영국의 카밀라 왕세자비라는 사실은 영국에서 이 센터의 의미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케 한다.
공간과 예술, 건축, 문화를 통해 힐링을 생각하는 매기 센터의 철학은 세계적인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지금까지 리처드 로저스, 자하 하디드, 프랑크 게리, 폴 스미스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세계적인 인사들이 매기 센터 건립에 참여했다.
리처드 로저스가 설계한 Hammersmith Charing Cross Hospital의 매리 센터
최근 2008년 리처드 로저스가 설계한 해머스미스 차링 크로스 매기 센터를 리처드 로저스 사무실 관계자와 함께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분주한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이 센터의 설계 목표는 ‘평화를 주는 심장을 심는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오렌지색 외벽으로 사방을 둘러싼 단층짜리 건물은 마치 아늑한 가정집 같았다. 환자와 그들 가족이 세상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도록 오픈 스페이스를 주기 위해 건물에 중정을 두고, 옥상에 데크를 깔아 휴식 공간을 뒀다. 건물 곳곳에 햇살이 가득 비친다. 매기와 친분이 있었던 리처드 로저스는 "런던은 열려 있는 곳이다. 예전부터 이 지역의 잘 디자인된 건물과 스페이스는 힐링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매기 센터는 이런 좋은 디자인을 지역에 공급하는 살아있는 모범 사례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리처드 로저스가 설계한 Hammersmith Charing Cross Hospital의 매리 센터
2006년 자하 하디드가 파이프(Fife)의 빅토리아 병원 안에 지은 매기 센터는 자하 하디드가 영국에서 지은 최초의 상설 건물이다. 자하 하디드의 전매특허인 기하학적이고 유기적인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건물이다. 자하 하디드는 기존 병원과 전혀 다르고, 암에 대한 인식을 뒤집는 건물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파이프(Fife) 매기 센터
2003년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던디(Dundee) 매기 센터는 건축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이다. 해체주의 건축가 프랑크 게리의 역동적인 동선이 반영된 아이코닉한 건축물이다. 리처드 로저스처럼 젠크스 부부와 친분이 있던 프랑크 게리는 이 건물을 지을 때 머릿속에 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이디시어(유럽에서 쓰이는 유대어)로 'Homelike(집 같은)'이라는 의미를 담은 'Heymish'라는 단어였다고 한다.
이들 스타 건축가들의 우정과 매기의 진지한 암에 대한 성찰을 통해 탄생한 매기 센터들은, 건축과 문화를 통한 아트테라피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시도라 생각된다.
폴 스미스가 실내 디자인을 한 노팅엄 매기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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