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그림과 조각품이 가득한 드넓은 미술관. 놀랍게도 전시 중인 작품은 전체 소장품의 평균 2~4%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96~98%의 작품은 온도와 습도를 철저히 관리하는 미술관 지하 창고나 외부 저장고에 꽁꽁 감춰져 있다. 최근 네덜란드의 미술사가이자 디자이너인 마이커 로젠뷔르흐(Maaike Roozenburg)가 미술관의 숨겨진 오브제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프로젝트의 첫 결과물을 공개했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의 두 손에 작품을 안겨줌으로써, 인류의 유산을 다시금 접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이다.
수년간 미술관 아카이브를 탐방해온 마이커 로젠뷔르흐는 약 4년 전부터 3D 스캐닝 기술을 이용해, 멀게만 느껴지던 미술관 오브제를 일반인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녀는 원래 이런 오브제는 단지 미술관 전시가 아닌 실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 존재 가치와 정신을 되살리고자 이런 오브제들을 직접 접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17세기 찻잔 세트와 3D 복제품
완성된 복제품은 스마트 폰이나 태블릿 PC의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로 감상할 수 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Rotterdam)의 보에이만스 반 뵈닝언 뮤지엄(Boijmans van Beuningen Museum)을 찾은 그녀는 17세기의 유리잔 세트에 반하고 말았다. 그녀는 무작정 갖고 싶었다며 “매우 모던해 보이는, 집에 두고 쓰고 싶은 오브제였다고 설명한다. 안타깝게도 그 유리잔은 미술관 측에서도 행여나 깨질까 봐 애지중지하는 작품이었고, 만지는 것조차 금지돼 있었다.
결국 그녀는 이 유리잔과 찻잔 세트 하나를 스캐닝해서 복제할 수 있을지의 가능성을 탐색하며, 해법을 찾기 위해 장장 6개월 동안 델프트 공대(Delft University of Technology)와 뵈닝언 미술관을 오갔다. 유리잔을 접착제로 회전판 위에 부착하고 스프레이를 뿌려 빛의 반사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제안했으나, 미술관 측은 즉각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녀는 일절 손상을 입히지 않고 아무 이상도 없으리라 입증하는 데 6개월이 걸렸다며 이번 일이 잘못됐다간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 난생 처음으로 스튜디오 마이커 로젠뷔르흐(Studio Maaike Roozenburg)에 보험을 들었다고 한다.
마침내 뵈닝언 미술관은 의료용 CT 스캐너를 이용해 오브제를 건드리지 않고 스캐닝 한다는 데 동의했다. 깨지기 쉬운 자기 찻잔을 환자용 테이블 위에 놓으면, CT 스캐너의 방사선원과 탐지기가 찻잔 주위를 회전하며 여러 각도에서 엑스선의 감쇠 수치를 측정한다. 이런 방법을 이용해 약 0.2mm 크기의 픽셀 해상도로 조각조각 정보를 얻어내면, 오브제의 두께와 문양을 탐지하기에 충분한 데이터가 나온다.
세부적인 정보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그녀는 미세한 부분까지 빠짐없이 스캐닝 할 수 있도록 오브제의 위치를 조정하는 데 신경을 썼다. 오브제에 나 있는 금이나 흠집 하나까지 모두 그대로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깨지기 쉬운 유리잔이라 그녀는 손도 댈 수 없었고, 동행한 미술관 직원이 장갑을 낀 손으로 오브제의 위치를 대신 조정해 주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최대 난제는 스캔 데이터를 프린트가 가능한 포맷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녀는 프린팅 작업이 이렇게 복잡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면서, 데이터가 있으니 프린트만 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데이터 파일을 변환하는 게 엄청 복잡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CT 스캐너는 3D 프린팅 작업에 쓰이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점으로 오브제를 산산조각 낸 스캔 파일은 입체적인 오브제와는 전혀 달랐다.
델프트 공대(Delft University of Technology)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프린트할 수 있는 3D CAD 모델로 스캔 파일을 변환하였다. 2차원 평면의 조각 모음을 3차원의 입체 덩어리로 변환한 것이다.
이런 스캔 파일을 고성능3D 프린터인 오브젝트 에덴(Object Eden)을 이용해, 16미크론의 정확도로 해상도를 최대화해 프린트하였다. 그런 다음, 찻잔 표면에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 태그를 넣어 광학적 표식 장치를 추가하였다. 이렇게 완성한 찻잔의 프린트로 석고 틀을 만든 후, 이를 주형으로 사용해 자기 오브제를 제작하였다.
최종 결과물은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라, 증강 현실 기술이 더해져 부가 정보를 담은 영상까지 제공한다. 헤이그 왕립예술대학(Royal Academy of Art, The Hague) 부설 증강 현실 연구소(Augmented Reality Lab)의 빔 반 에크(Wim van Eck)와 함께 그녀가 고안한 작업은 물리적 오브제 위에서 3D 동영상이 펼쳐지게끔 AR을 입히는 것이었다. 즉 해당 오브제의 기원에 대한 부가 정보와 함께, 스캔의 대상인 원본의 금빛 장식을 가상의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픽 디자인 학과의 학생들이 게르트 덤바(Gert Dumbar)의 지도 하에, 오브제에 덧입힐 AR의 초안을 스케치했다. 여기에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라이크 프렌즈(Like Friends)의 도움이 더해져, 17세기의 해상 지도나 회화, 판화, 모형 등 역사적 자료에 대한 정보까지 결합하였다.
이렇게 덧입힌 AR은 위치 기반 AR 서비스 및 이미지 인식 기능을 제공하는 스마트 폰 앱 주나이어(Junaio)를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마트 폰을 복제품에 가까이 대면, 오브제에는 없는 세부적인 부분을 볼 수 있고 역사적 정보까지 폭넓게 얻을 수 있다. 주입 성형(Slip Cast) 방식의 이 자기 찻잔 세트는 뵈닝언 미술관에서 전시되었고, 관람객들은 본인의 스마트 폰을 가이드 삼아 오브제를 직접 만져가며 맘껏 교감할 수 있었다.
미술품 탐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그녀는 새로운 복제 기법이 나오는 대로 속속 테스트하는 한편, 미술관 담장 너머 소장품의 새로운 삶을 바라는 다른 미술관들과도 협력을 강구중에 있다. 현재 세계 유수의 여러 미술관과 함께, 이야기가 담긴 복제품 콜렉션 제작을 논의 중인 그녀는 다양한 종류의 식기는 물론, 궁극적으로는 가구 복제까지 시도해볼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작업이 오브제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 평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미술사가인 그녀 자신도 궁금한 부분이다.
마이커 로젠뷔르흐는 앞으로 복제 작업이 훨씬 쉬워질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품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뭐든 굉장히 쉽게 복제할 수 있다면 과연 진품은 어떻게 될지, 진품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평가는 어떻게 변할지 생각해보는 것만도 흥미롭다고 본다. 그녀는 이번 프로젝트를 계속 밀고 나가, 복제품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해볼 생각이다. 3D 프로토타입 기술이 역사적인 전통 기법과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지, 디지털 콘텐트와 복제품의 접목에 있어 오브제의 품격과 의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말이다.
'착한디자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우케 크노트네러스(Bauke Knottnerus) 아티스트 (0) | 2014.12.22 |
---|---|
LA 오토쇼 디자인 챌린지(LA Auto Show Design Challenge) (0) | 2014.12.22 |
페르난도 앤 움베르토 캄파나(Fernando & Humberto Campana) 숲 전시회 (0) | 2014.12.19 |
스튜디오 푸이스토 아키텍츠(Studio Puisto Architects) 드림 호텔 (0) | 2014.12.18 |
키네마틱스 드레스(Kinematics Dress) (0) | 2014.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