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chocohuh 2013. 1. 15. 08:21

여기 수록된 문장을 소설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내게는 약간의 저항감이 있다.

보다 확실하게 말하면 이것은 정확한 의미에서의 소설이 아니다.

내가 소설을 쓰려고 했을 때 나는 모든 현실적인 제재 -그런것이 만약에 있다면 하는 말이지만- 를 커다란 냄비에 한 데 집어넣고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용해한 후에 그것을 적당한 모양으로 찢어내어 사용한다. 빵가게의 리얼리티는 빵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소맥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 수록된 문장은 원칙적으로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었다. 물론 나는 당사자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세부를 여러가지로 주물렀기 때문에 완전한 사실이라고는 할수 없지만 그러나 얘기의 줄거리는 사실이다. 나는 들은 그대로의 얘기가 되도록 그 분위기를 깨지 않도록 하면서 문장으로 옮긴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문장을 -잠정적으로 스케치라고 부르기로 하자- 처음에는 장편에 착수하기 위한 워밍업삼아 쓰기 시작했다. 사실을 되도록 사실 그대로 써 두는 작업은 나중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일로 문득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처음에 나는 이 스케치들을 활자화시킬 생각은 전혀없었다. 이것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써서는 서재의 책상속에 넣어둔 여타의 무수한 단편적인 문장들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될 처지였다.

그러나 하나 둘 써가면서 나는 그 얘기들 하나하나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들은 <얘기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게 기묘한 체험이었다.

 

예를 들어 소설을 쓸때 나는 내 스타일과 소설의 전개를 따라 극히 무의식중에 재료가 되는 단편을 고르고 있다. 그러나 나의 소설과 나의 현실생활이 구석구석까지 합치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그러고보면 나 자신과 나의 일상생활도 딱 맞아 떨어지게 합치되고 있지는 않다) 아무리 해도 내 안에 소설로는 제대로 쓸 수 없는 앙금과 같은 것이 쌓이게 된다. 내가 스케치로 썼던 것은 그 앙금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앙금은 나의 의식 저 밑에서 어떤 형태를 빌어 얘기 될 기회가 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종류의 앙금을 모으게 된 원인중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내 얘기를 하기보다는 남의 얘기를 듣는 쪽을 훨씬 좋아한다. 게다가 내게는 다른 사람의 얘기속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재능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사실, 대개의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내 자신의 얘기보다 훨씬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것도 특수한 사람의 특수한 얘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얘기 쪽이 훨씬 재미있다.

이러한 능력 -남의 얘기를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능력- 이란 구체적으로 뭔가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근래 몇년동안 소설을 쓰고 있지만 소설가로서도 역시 이런 능력이 어떤 도움이 되었던 경험은 한번도 없다. 아니 몇번인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생각은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얘기를 하고, 나는 그것을 경청하고 그 얘기가 내 속에 쌓여갔을 뿐이다.

만일 이러한 능력이 나의 소설가로서의 특질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참을성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한다. 재미라는 것은 참을성이라는 필터를 통해야 비로소 표출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고, 소설의 문장이라는 것들 대부분은 그러한 위상위에 성립한다. 재미라는 것은 뱀의 입을 비틀어 컵에 담아서는 자,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미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때로 그것은 기우제의 춤같은 것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 문장의 취지와는 관계가 없다. 문맥을 원래대로 되돌리자.

사람들 얘기의 대부분은 사용할 길이 없는 채로 내 안에 쌓인다. 그것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밤에 내리는 눈처럼 그저 조용히 쌓여가는 것이다. 이것은 남의 얘기를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공통되는 괴로움이다. 가톨릭 교회사는 사람들의 고백을 천상이라는 대조직에 넘겨줄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편리한 상대도 없다.

 

자기 자신속에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커슨 맥글러스의 소설속에도 조용한 벙어리 청년이 등장한다. 그는 누가 무엇을 얘기해도 친절하게 귀를 기울이며, 어떤 때는 동정하고, 어떤때는 같이 기뻐한다. 사람들은 끌려들 듯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여러가지 고백이나 숨겨두어던 얘기를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청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그에게 강요했을 뿐 누구하나 그의 기분을 알아주지 못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그러나 물론 내 자신의 모습을 그 벙어리 청년에게 오버랩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하는 일이 있고 게다가 문장도 쓰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금이라는 것은 몸속에 확실하게 쌓여가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소설이라는 형태를 일시적으로 방기했을 때, 극히 자연스럽게 이러한 일련의 제재가 내 의식의 수면에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리라. 나에게는 이 스케치의 제재들이 의지할 곳도 없는 고아들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어떤 소설에도 어떤 문장에도 편입되는 일없이 내속에서 줄곧 잠들어 버린다.

그러나 그러한 제재를 문장으로 만들어서 내가 조금이라도 편안한 기분이 되느냐 하면 그런 일은 없다. 이것만은 내 자신의 변변치 못한 명예를 위해서라고 말해두지 않으면 안되겠다. 나는 내 자신이 편해지기 위해 이러한 스케치를 쓰고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도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말해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느끼는 것이다. 나 자신의 정신이 해방되는지 어떤지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고 적어도 지금 이런 문장을 씀으로써 나의 정신이 해방될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기 표현이 정신의 해방에 기여한다는 것은 미신이며 호의적으로 말한다고 해도 신화이다. 적어도 문장에 의한 자기 표현은 누구의 정신도 해방시키지 못한다. 만일 그러한 목적을 위해 자기 표현을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런 생각을 단념하는 게 좋다. 자기 표현은 정신을 세분화시킬 뿐이며 그것은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만일 뭔가에 도달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사람은 쓰지 않을 수 없기때문에 쓰는 것이다. 쓰는 것 자체에는 효용도 없고 그에 따른 구원도 없다.

그런 이유로 앙금은 변함없이 앙금인채로 내 안에 남아있다. 나는 언젠가 그것을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 새로운 소설 속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넣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만일 넣지 않는다면 그 앙금들은 내 속에 봉인된 채 어둠속으로 사라져갈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앙금을 이런 형태의 스케치로 정리할 수 밖에 다른 수가 없다. 이것이 정말 올바른 작업인지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진짜 소설을 썼어야만 하지 않았나 하는 얘기를 들으면 나는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모든 행위는 선이다.>라고 말한 어느 살인범의 얘기를 인용할 수밖에 없다. 내게는 이러한 제재를 이러한 스타일로 정리하는 것 외에 달리 취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여기 수록한 문장을<스케치>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소설도 논픽션도 아니기 때문이다. 제재는 어디까지나 사실이고 그것을 담은 그릇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만일 각각의 얘기속에 뭔가 기묘한 점이나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다 읽는데 그다지 인내가 필요치 않았다면 그것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리고 그 얘기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어떤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앙금이란 그 무력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것이 이 무력감의 본질이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집어 넣을 수 있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운행시스템을 소유하고 있지만 이 시스템은 동시에 우리들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회전목마와 흡사하다. 그것은 정해진 장소를 정해진 속도로 돌고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내릴 수도 갈아 탈 수도 없다. 누구를 앞지르지도 않고 누구에게 앞지름을 당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회전목마 위에서 가상의 적을 향해 치열한 데드 히트(격심한 경쟁)를 전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사실이라는 것이 어떤 경우에 기묘하게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비치는 것은 어쩌면 그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어떤 종류의 내제적인 힘의 압도적인 많은 부분은 그 발생과 동시에 없어져 버렸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아울러 그 공백이 우리 인생의 다양한 위상에 기묘하고 부자연스러운 왜곡을 초래하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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