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자, 바람 내음이 났다. 과실처럼 풍요로움을 지닌 5월의 바람이다. 그 바람에는 까끌까끌한 껍질이 있고, 과육의 끈적함이 있고, 씨앗 알갱이가 있었다. 과육이 공중에서 터지자 씨앗이 부드러운 총알이 되어 내 드러난 팔에 박혔다. 아릿한 아픔만 뒤에 남았다.
"지금 몇 시야?"
사촌 동생이 내게 물었다. 키가 근 20센티미터나 차이가 나 사촌 동생은 항상 나를 올려다 보듯 하며 말했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10시 20분."
"그 시계 맞는 거야?"
사촌 동생은 또 물었다.
"맞을 거야."
사촌 동생은 내 손목을 잡아당겨 시계를 보았다. 가늘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보기보다는 힘이 셌다.
"이거, 비싼 시계야?"
"아니, 싸구려야."
시각표를 다시 살피면서 나는 말했다.
반응이 없다.
사촌 동생 쪽을 보니,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이가, 퇴행한 뼈처럼 보인다.
"싸 구 려 야."
나는 사촌동생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정확하게 끊어 다시 말했다.
"싸 구 려 이 기 는 하 지 만 제 법 정 확 해."
사촌 동생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사촌 동생은 오른쪽 귀가 안 좋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야구공에 귀를 맞았다. 그 뒤로 청력에 장애가 생겼다. 그렇다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보통생활을 하고 있다. 교실에서는 왼쪽 귀가 선생 쪽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항상 제일 앞자리 오른쪽에 앉는다. 성적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에게는 외부의 소리가 비교적 잘 들리는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가 있다. 그 시기는 밀물과 썰물처럼 번갈아 찾아온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반년에 한 번 정도로 거의 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마치 오른쪽 귀의 침묵이 깊어져, 그 침묵이 왼쪽에서 들리는 소리까지 지워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되면 물론 평범하게 생활할 수 없다. 학교도 쉬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이유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의사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예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치료도 불가능하다.
"시계란 말이지, 비싸다고 다 정확한 것은 아닌가 봐."
사촌 동생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전에 갖고 있던 시계는, 제법 비싼 거였는데도 툭하면 고장 났었거든. 중학교에 올라갔을 때 엄마가 사준 거였는데, 1년 만에 잃어버려서, 그 다음부터는 시계 없이 지내고 있어. 다시 안 사 주셨거든."
"시계가 없으니까 불편하지?"
"응?"
사촌 동생이 되물었다.
"불편하지 않느냐구, 시계가 없어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다시 말했다.
"아니, 별로."
사촌 동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산속에 혼자 사는 것도 아니니까, 시간 정도는 아무한테나 물을 수 있잖아."
"하긴 그렇군.'
그리고 우리는 또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촌 동생이 느끼고 있는 긴장을,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이라도 풀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5년 만에 만났다. 5년 동안에 사촌 동생은 아홉 살에서 열네 살이 되었고, 나는 스무 살에서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 그 시간의 공백은 우리 사이에 제대로 통과할 수 없는 반투명한 칸막이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다. 필요한 사항을 말하려 해도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말을 더듬거나 혹은 말을 삼키거나 할 때마다 사촌 동생은 항상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왼쪽 귀가 내 쪽으로 향해 있었다.
"지금 몇 분이야?"
사촌 동생이 물었다.
"10시 25분."
나는 대답했다.
버스가 온 것은, 10시 32분 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비하면 버스 모양이 한결 새로웠다. 운전석 앞의 커다란 유리창이 날개가 뜯어져 나간 대형 폭격기처럼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붐볐다. 통로에 서 있는 손님은 없었지만 우리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좌석에 앉지 않고 맨 뒤 문 앞에 서 있기로 하였다. 그렇게 먼 길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시간대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타고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철 역 앞에서 출발하여 구릉지에 있는 주택가를 돌아 다시 역으로 돌아가는 노선 순환 버스다. 노변에 무슨 특별한 명소나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학교가 몇 군데 있어 통학 시간대에는 상당히 붐비지만, 점심 시간쯤이면 버스는 항상 텅텅 비어있기가 예사다.
나와 사촌 동생은 각자 한 손으로 가죽 손잡이와 기둥을 잡고 있었다. 버스는 반짝반짝하여, 방금 전에 완성되어 공장에서 거리로 나온 것처럼 보였다. 금속 부분에는 얼룩 한 점 없어 그 표면에 얼굴이 또렷하게 비칠 정도다. 좌석 깔개도 말끔하고, 새 기계 특유의 자랑스럽고 낙천적인 분위기가 나사 하나하나에까지 어려 있었다.
버스가 새로워졌다는 점과, 승객의 수가 뜻밖에 많다는 점이 나를 다소 혼란에 빠뜨렸다. 어쩌면 이 노선 주변의 환경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버스 안을 주의 깊게 돌아보고 나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은 옛날과 다름없는 한적한 교외 주택지의 풍경이었다.
"이 버스 타면 되는 거지?"
사촌 동생이 불안스럽다는 듯 물었다. 내가 버스를 탄 뒤부터 어쩔 바를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기에, 아마 걱정이 된 모양이다.
"음, 맞아."
나는 거의 자신에게 말하듯 대답하였다.
"잘못 탈 수가 없어. 여기에는 이 노선버스 밖에 다니지 않거든."
"옛날에 이 버스 타고 고등학교 다녔더랬어?"
사촌 동생이 물었다.
"응."
"학교, 좋아했어?"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학교에 가면 친구도 만날 수 있고, 다니는 것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어."
사촌 동생은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그 사람들 지금도 만나?"
"아니 벌써 안 만난 지 오래 됐어."
나는 말을 골라서 대답하였다.
"왜? 왜 안 만나는데?"
"줄곧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은 아니었지만,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 자리 가까이에 노인들이 단체로 모여 앉아 있었다. 전부 열다섯 명 정도는 되었으리라. 버스가 복잡했던 것은 그 노인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노인들은 모두 보기 좋게 타 있었다. 목덜미 뒤까지 고르게 까맸다. 그리고 한 명도 예외 없이 홀쭉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등산용 두꺼운 셔츠를 입고 있었고 여자들은 검소하고 간결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전원이 가벼운 등산 때 사용하는 조그만 배낭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노인네들의 외견은 신기할 정도로 비슷했다. 마치 항목별로 정리된 무슨 샘플 서랍을 하나 빼내 그대로 가지고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좀 이상하다. 이 버스의 노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나는 손잡이에 매달려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럴듯한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 치료, 아플까?"
사촌 동생이 내게 물었다.
"글쎄, 어떨까. 나는 자세한 예기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거든."
"지금까지 귀 때문에 병원에 간 일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돌이켜 보면, 귀 때문에 병원에 간일은 태어난 이래 한 번도 없다.
"지금까지 치료하면서 상당히 아팠니?"
나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런 건 아니야."
사촌 동생은 대답하기 애매하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
"물론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아플 때도 있어. 하지만 굉장히 아픈 것은 아니야."
"그럼 이번에도 비슷하지 않을까. 어머니 말씀으로는, 지금까지와 특별히 다른 치료를 하는 것도 아닌 모양이던데."
"그렇지만, 지금까지 받은 치료와 별 다름없는 치료를 한다면, 역시 같은 식으로 잘 낫지 않는 거 아닐까?
"그건 알 수 없지. 혹시 무슨 좋은 수가 생길 수도 있는 거잖아."
"뚜껑이 퐁 열리는 것처럼?"
사촌 동생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힐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의식적으로 뒤틀린 표현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말했다.
"의사가 바뀌면 기분도 바뀔 것이고, 사소한 절차상의 변화가 큰 의미를 지니는 일도 있는 법이야. 그렇게 쉽사리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뭐 포기한 것은 아니야."
사촌 동생이 말했다.
"그럼, 넌더리가 나니?"
"음, 조금은."
사촌 동생은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었다.
"제일 괴로운 것은 무서움이야. 실제의 통증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통증을 상상하는 쪽이 훨씬 무섭고, 싫어. 그런 기분 알겠어?"
"알 것 같아."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 해 봄에는 여러 가지 많은 일이 생겼다. 사정이 있어 그 때까지 2년 동안 다니던 도쿄의 조그만 광고대리점을 그만두었다. 그 일을 전후로 하여, 대학시절부터 사귀던 여자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 다음 달 할머니가 장암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조그만 가방하나만 가지고 5년 만에 이 도시로 돌아왔다. 집에는 내가 사용하던 방이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책꽂이에는 내가 읽었던 책이 꽂혀 있었고, 내가 잠잤던 침대, 내가 사용했던 책상, 내가 들었던 옛날 레코드가 남아있었다.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오래 전에 색과 향을 잃고, 바싹 메말라 있었다. 하지만 시간만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2,3일 쉬고 곧바로 도쿄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새 직장을 구할 연줄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한번 말을 꺼내 볼 생각이었다. 기분전환을 위해 이사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다라 몸을 움직이기가 점점 귀찮아졌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러고 싶어도 나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있었다.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옛날 레코드를 듣고, 옛날에 읽은 책을 다시 읽고, 가끔은 정원의 잡초를 뽑기도 하였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가족 이외의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큰어머니가 찾아와, 네 사촌 동생이 새 병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좀 데리고 가 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사실은 내가 따라가야 하는데 그 날은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그렇다고 큰어머니는 말했다. 그 병원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에 있어서 장소는 알고 있었다. 시간도 충분하였고,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큰어머니는 나한테, 이것으로 둘이서 식사라도 하라며 봉투에 든 돈을 건네주었다.
사촌 동생이 다른 병원에 다니게 된 것은 그 때까지 다닌 병원에서 받은 치료가 거의 효과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효과는커녕, 그의 난청 사이클은 이전보다 훨씬 주기가 짧아졌다. 그 때문에 큰어머니가 병원 측에 불만을 털어놓자, 병의 원인이 외과적인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네 가정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되려 면박을 주어 싸움이 벌어졌다. 하기야 병원을 바꾼다고 해도 사촌 동생의 청각장애가 당장 쾌유하리라고는 솔직히 말해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의 귀에 대해 거의 포기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와 사촌 동생은 집은 가까웠지만 나이가 열 살 이상이나 차이가나는 탓에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면, 잠시 어디로 데리고 가거나 함께 놀아주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알게 모르게 친척들은 나와 그 사촌 동생을 '한 쌍'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즉 그가 나를 잘 따르고, 나 또한 그를 각별히 귀여워하고 있다는 식으로 여겼던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지금,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왼쪽 귀를 가만히 내 쪽으로 향하고 있는 사촌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절절해졌다. 친척들이 왜 나와 그를 하나로 묶으려고 했는지 조금은 알 듯 한 기분이었다.
버스가 일고여덟 번째 정거장을 지나는 즈음에 사촌 동생이 또 불안한 눈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더 가야 돼?"
"그래 아직 멀었어. 큰 병원이라서 금방 눈에 띄니까 걱정 마."
차창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이 노인들이 쓴 모자챙과 목에 두른 스카프를 살랑살랑 건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대관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형. 우리 아빠회사에서 일하게 되는 거야?"
사촌 동생이 내게 물었다.
나는 놀라 사촌 동생의 얼굴을 보았다. 사촌 동생의 아버지는, 즉 나의 큰아버지는 고베에서 꽤 큰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가능성은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누군가 넌지시 운을 띄운 적도 없었다.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사촌 동생은 얼굴을 붉혔다.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좋잖아. 앞으로 죽 여기에 있을 수 있고, 다들 기뻐할 텐데."
그는 말했다.
녹음테이프에서 정거장 이름이 흘러나왔지만 정차버튼을 누르는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정거장에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그렇지만, 도쿄로 돌아가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나는 말했다. 사촌 동생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따위, 그 어디에도 한 가지도 없다. 그렇지만 다른 데라면 몰라도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버스가 산비탈을 올라가기 시작하자 집들은 드문드문해지고 울창한 나뭇가지가 길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담장이 낮고, 외벽에 페인트를 칠한 외국인 주택도 눈에 띄었다. 바람이 약간 싸늘해졌다. 버스가 커브 길을 돌 때마다 눈 아래로 바다가 보였다가 가려지곤 했다. 나와 사촌동생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그런 바깥 풍경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사촌 동생은 진료시간도 길고,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까 어디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담당의사에게 인사를 한 뒤 나는 진료실에서 식당으로 갔다. 그 날 아침, 밥을 거의 먹지 않아 배가 고팠지만 메뉴에 적힌 음식들은 전혀 내 식욕을 자극하지 못했다. 결국 커피만 주문했다.
평일 오전이라 식당에는 나 외에 일가족이 한 무리 있을 뿐이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버지인 듯 한 남자가 감색 줄무늬 잠옷을 입고 비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어머니와 조그만 쌍둥이 여자애들이 문병객이었다. 쌍둥이는 똑같은 흰색 원피스를 입고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테이블에 엎드린 자세로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아버지는 병인지 어디를 다쳤는지, 증상이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인지 부모들이나 아이들 모두 조금씩은 따분하다는 듯 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창밖으론 죽 잔디밭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스프링클러가 소리를 내면서 회전하고, 초록색 잔디위로 하얀 빛의 물방울을 뿌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소리로 우는 꼬리 긴 새가 두 마리, 잔디밭 위를 똑바로 가로질러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잔디밭 건너에는 테니스 코트가 몇 개있었다. 그러나 네트는 제거되어 있었고,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코트 너머로는 느티나무가 죽 서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잔잔한 파도가 초여름의 태양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느티나무의 새 잎을 어루만지고, 스프링클러의 규칙적인 물줄기를 조금씩 흔들었다.
오랜 옛날, 같은 풍경을 어디에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넓은 잔디밭이 있고, 쌍둥이 여자애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꼬리 긴 새가 어디론가 날아가고, 네트가 없는 테니스 코트 너머로 바다가 보이고.......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그 리얼리티는 너무도 생생하고 강렬하였지만, 그러나 착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 병원에 오늘 처음 온 것이다.
두 다리를 건너편 의자에 올려놓고,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어둠 속으로 하얀 덩어리가 보였다. 현미경으로 보는 미생물처럼, 그것은 소리도 없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였다. 형태를 바꾸며 확산하여 산산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하나가 되었다.
그 병원에 간 것은 8년 전 일이었다. 해안 근처에 있는 조그만 병원이었다. 식당 창문으로 협죽도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낡은 병원이라, 항상 비가 내리는 듯 한 냄새가 났다. 친구의 걸 프렌드가 거기서 가슴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친구와 함께 문병 간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대단한 수술은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뼈 하나가 약간 안쪽으로 어긋나 있어서 그것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수술이었다. 긴급을 요하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언젠가 해야 하는 수술이라면 지금 해 두자는 셈이었다. 수술자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지만, 수술 후의 안정이 중요하여 그녀는 열흘정도 입원해 있었다. 우리는 야마하125cc 오토바이를 타고 병원에 갔다. 갈 때는 그가 운전하고 돌아올 때는 내가 운전하였다. 함께 가자는 부탁을 받았던 것이다.
"나 혼자서 병원 같은 데 가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는 그렇게 말했다.
친구는 역 앞 과자점에 들러 초콜릿을 샀다. 나는 한 손으로는 그 친구의 벨트를 잡고 한 손으로는 초콜릿 상자를 꽉 쥐고 있었다. 무더운 날이라 우리의 셔츠는 땀으로 푹 젖었다가 다시 바람에 마르기를 반복하였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 알지도 못할 노래를 한심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는 그 때 그의 땀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 그 친구는 그 얼마 후에 죽었다.
그녀는 파란 잠옷을 입고 무릎까지 오는 얇은 가운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우리는 셋이서 식당 테이블에 앉아 쇼트 호프를 피우고 콜라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녀는 배가 몹시 고파 있었다. 설탕을 뿌린 도넛을 두 개 먹고, 크림이 듬뿍 들어있는 코코아를 마셨다. 그런데도 배가 덜 찬 모양이었다.
"퇴원할 때쯤이면 돼지가 돼 있겠군."
친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상관없어. 회복기니까."
그녀는 도넛의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종이 냅킨으로 닦으며 말했다.
둘이 예기하는 동안 나는 창밖의 협죽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가지가 무성하여 조그만 숲처럼 보였다. 파도 소리도 들렸다. 창문난간은 소금기 섞인 바람으로 덕지덕지 녹이 슬어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골동품 같은 선풍기가 실내의 후텁지근한 공기를 휘젓고 있었다. 식당 안에서는 병원 냄새가 났다. 먹은 음식에서도 마시는 물에서도,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병원냄새가 났다. 그녀의 잠옷에는 가슴주머니가 두 개 달려 있었다. 한쪽 주머니에 조그만 금색 볼펜이 들어있었다. 몸을 앞으로 숙이면 V자 형으로 파인 목선으로 햇볕에 타지 않은 하얗고 편평한 가슴이 보였다.
거기서 내 사고는 갑자기 멈춘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하고 나는 생각한다. 콜라를 마시고, 협죽도를 바라보고, 그녀의 가슴을 보고, 그리고 그 다음은? 플라스틱의자에 위에서 몸의 위치를 바꾸고, 턱을 괸 채 기억의 층을 파헤쳐 본다. 뾰족한 나이프 끝으로 코르크 마개를 파내는 것처럼.
......나는 눈길을 돌리고, 의사들이 그녀의 가슴살을 헤집고 그 안으로 고무장갑을 낀 손가락을 쑤셔 넣어, 뼈의 위치를 바로잡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비현실적인 일처럼 여겨졌다. 무슨 비유담처럼 생각되었다.
그래. 그 다음 우리는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다. 얘기를 꺼낸 것은 내 친구다. 어떤 얘기를 했더라? 아마 내가 한 어떤 일에 관해서이리라. 내가 여자애를 꼬시려 했는데 잘 안 풀렸다는 둥, 아마 그런 얘기일 것이다. 실제로는 대수로운 사건도 아니었는데 거기에 살을 붙이고 재미있게 얘기해 그녀는 폭소를 터뜨렸다. 나도 덩달아 웃었을 정도다. 그는 얘기 솜씨가 좋다.
"그만 웃겨."
그녀가 고통스럽게 말했다.
"웃으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단 말이야."
"어디. 어디가 아픈데?"
친구가 물었다.
그녀는 심장 언저리, 왼쪽 유방의 조금 안쪽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친구가 그걸 가지고 또 농담을 하여, 그녀는 또 웃고 말았다.
손목시계를 본다. 11시 15분. 사촌 동생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가까운 탓인가, 식당이 붐비기 시작하였다. 갖가지 소리와 말소리들이 뒤섞여 연기처럼 실내를 감싸고 있다. 다시 기억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가슴 주머니 속 조그만 금색 볼펜에 관해서 생각한다.
......그렇지, 그녀는 그 금색 볼펜으로 종이 냅킨 위에 무슨 그림을 그렸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에 종이 냅킨은 너무 부드러워, 볼펜 끝이 걸리고 만다. 그래도 그녀는 언덕을 그렸다. 언덕 위에는 조그만 집이 있다. 그 집에는 여자가 한 명 잠들어 있다. 집 주변에는 장님 버드나무가 무성하다. 장님 버드나무가 여자를 잠에 빠뜨렸다.
"장님 버드나무라니, 대체 무슨 나무야?"
우리들이 물었다.
"으응, 그런 식물이 있어."
"들어본 적 없는데?"
"내가 만든 거니까."
그녀는 미소 지었다.
"장님 버드나무한테는 아주 독한 꽃가루가 있는데, 그 꽃가루를 묻힌 조그마한 파리가 귀로 파고 들어가 여자를 잠들게 하는 거야."
그녀는 새 종이 냅킨을 한 장 꺼내, 장님 버드나무를 그렸다. 장님 버드나무는 철쭉정도 크기의 나무였다. 꽃도 피지만, 그 꽃은 두꺼운 녹색 잎으로 폭 싸여 있다. 잎은, 도마뱀 꼬리가 잔뜩 모여 있는 것 같은 모양이다. 장님 버드나무는 조금도 버드나무처럼 보이지 않았다.
"담배 있어?"
친구가 내게 물었다. 나는 땀으로 젖은 쇼트 호프 곽과 성냥을 테이블 건너 그에게 던졌다.
"장님 버드나무는 겉보기는 작지만, 뿌리는 아주 깊은 데까지 뻗어 있어."
그녀가 설명하였다.
"실제로, 어느 연령에 도달하면 장님 버드나무의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밑으로 밑으로만 뻗어. 마치 어둠을 양분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파리가 그 꽃가루를 묻히고 귀로 들어가 여자를 잠재운다는 말이지?"
친구가 눅눅한 성냥으로 고생스럽게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그래서...... 그 파리는 뭘 하는데?"
"물론, 여자의 몸 안에서 그 살을 먹지."
그녀가 말했다.
"우적우적."
친구가 말했다.
그렇다. 그녀는 그 여름, 장님 버드나무에 관한 긴 시를 써서, 그 줄거리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 시는 그녀에게 부과된 유일한 방학숙제였다. 어느 날 밤에 꾼 꿈에서 착상을 얻어 침대 위에서 일주일이나 들여 긴 시를 완성하였다. 친구가 읽어보고 싶다고 했지만, 아직 손질이 덜 되었다면서 그녀는 거절하였다. 대신 그림으로 시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장님 버드나무의 꽃가루 때문에 잠에 빠진 그 여자를 구하기 위하여 젊은 남자가 한 명 언덕을 올라갔다.
"그건 나를 뜻하는 거지, 안 그래?"
친구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남자는 네가 아니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친구가 물었다.
"난 알 수 있어."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알 수 있는지는 몰라. 하지만 알아. 속상하니?"
"물론이지."
친구는 절반은 농담조로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젊은이는 앞을 가로막듯 빽빽하게 자라 있는 장님 버드나무를 헤치고 천천히 언덕을 올라갔다. 실은 장님 버드나무가 무성해지기 시작한 이래 그 언덕을 올라간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 써 눈을 가리고, 한 손으로 몰려드는 파리들을 쫓으면서 젊은이는 걸음을 옮겼다. 잠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하여, 그녀를 길고 깊은 잠에서 깨우기 위하여.
"하지만 결국 여자의 몸 전체가 언덕 꼭대기에서 파리에게 다 먹혀 버렸다는 말이지?"
친구가 물었다.
"그래,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가 대답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파리에게 완전히 먹혀 버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슬픈 이야기겠구나."
친구가 말했다.
"그렇지 뭐."
그녀가 잠시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녀가 나에게 질문하였다.
"나도 슬픈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내가 말했다.
사촌 동생이 돌아온 것은 12시 20분 이었다. 왠지 초점이 맞지 않는 표정을 짓고, 약이 든 봉투를 들고 있었다. 식당 입구에 모습을 보이고,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찾아오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다. 몸의 균형이 잘 맞지 않은 듯 어색한 걸음걸이였다. 나와 마주한 자리에 앉아, 너무 바빠서 잠시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렸던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어땠어?"
내가 물어보았다.
"음."
그가 대답하기를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좀처럼 시작되지 않았다.
"배고프니?"
내가 물었다.
사촌 동생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여기서 먹을까, 아니면 버스 타고 시내로 나가서 먹을까, 어느 쪽이 좋겠어?"
사촌 동생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식당 안을 휘 둘러보고는, 여기라도 좋아, 라고 말했다. 나는 식권을 사 런치2인분을 주문하였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사촌 동생은 창 밖 풍경을 바다며, 느티나무 가로수며, 스프링클러며, 아까까지 내가 보았던 똑 같은 풍경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옆 테이블에서는 말끔한 차림의 중년부부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폐암으로 입원해 있는 아는 사람 이야기를 하였다. 5년 전에 금연을 했는데, 너무 늦게 담배를 끊었다는 둥, 아침에 일어나서 심하게 객혈을 했다는 둥, 그런 이야기였다. 부인이 질문하고, 남편이 그에 대답하였다. 암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인간의 삶의 경향이 응축된 것이기도 하다고 남편이 설명하였다.
런치는 햄버거 스테이크와 흰 살 생선 튀김에 샐러드와 롤빵이 곁들여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하고 묵묵히 그것을 먹었다. 그 동안 옆에 앉은 부부는, 암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성되는 지에 대해 열심히 말을 주고 받았다. 최근에 왜 암환자 수가 늘어났는지, 왜 특효약이 없는지, 그런 내용들이었다.
"어디든 대개 비슷해."
사촌 동생이 자기 두 손을 바라보면서, 어딘가 모르게 두께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비슷한 질문을 하고, 비슷한 검사를 할뿐이야."
우리는 병원 문 앞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이따금 머리 위의 나뭇잎들을 흔들었다.
"전혀 들리지 않는 일들이 종종 있니?"
나는 사촌 동생에게 물어보았다.
"음. 아무 것도 안 들려."
사촌 동생이 대답했다.
"어떤 느낌이 들까?"
사촌 동생은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에 잠겼다.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있어. 문득 알게 되는데. 하지만 스스로 자각하게 되기까지 좀 시간이 걸려. 자각했을 때는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귀마개를 하고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말이야. 한참동안이나 그 상태가 계속돼. 그 동안 분명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하지만 소리뿐만이 아니야. 들리지 않는 것은 그 상태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아주 기분이 나쁘니, 그럴 때는?"
사촌동생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싫지는 않아. 다만 여러 가지로 불편할 뿐이지.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말이야."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미지가 잘 전해지지 않았다.
"존 포드 감독의 <아파치 요새>란 영화를 본 적 있어?"
사촌 동생이 물었다.
"오래 전에 본 적 있지."
나는 말했다.
"지난번에 텔레비전에서 하는 것을 보았어. 굉장히 재미있는 영화였어."
"그래."
나는 맞장구를 쳤다.
"영화 시작할 때, 서부의 요새에 새 장군이 부임해 오잖아. 그 장군을 고참 대위가 맞이하는데, 배우는 존 웨인이었어. 장군은 아직 서부에 대해서 잘 모르고, 요새 주변에는 인디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어."
사촌 동생이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요새에 도착하자 장군은 존 웨인에게 이렇게 말해. '여기까지 오는데 인디언을 몇 명이나 보았다.' 그랬더니 존 웨인이 시침뗀 얼굴로 이렇게 대답해. '괜찮습니다. 각하가 인디언을 보았다는 것은, 즉 인디언이 거기에 없다는 뜻입니다.' 라고 말이야. 정확한 대사는 잊어버렸지만, 대충 그런 말이었을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형?"
<아파치 요새>에 그런 대사가 있었는지 나는 기억나지 않았다. 존 포드의 영화 대사치고는 좀 난해한 듯 한 기분이 들었다. 하기야 그 영화를 본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모두의 눈에 잘 보이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사촌 동생은 눈썹을 찡그렸다.
"나도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일로 누군가 나를 동정할 때마다, 왠지 그 대사가 떠올라. '인디언을 보았다는 것은, 즉 거기에 인디언이 거기에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웃었다.
"이상해?"
사촌 동생이 물었다.
"음. 좀 이상하구나."
내가 말했다. 사촌 동생도 웃었다. 그가 웃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잠시 짬을 두고 사촌 동생이 고백하듯 말했다.
"형, 내 귀 좀 들여다 봐주지 않을래?"
"귀를 들여다 보라구?"
나는 놀라 물었다.
"그냥 바깥에서 보기만 하면 돼."
"할 수는 있지만, 왜?"
"그냥."
사촌 동생은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어떤 식으로 생겼는지, 그냥 좀 봐주었으면 해서."
"그래 좋아, 한번 보지 뭐."
나는 말했다.
사촌 동생은 등을 보이고 앉아 오른쪽 귀를 내게로 향했다. 새삼스럽게 보니, 제법 잘 생긴 귀였다. 크기는 작았지만 귓밥이 막 구워 낸 마드레느 처럼 도톰하였다. 다른 사람의 귀를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리저리 관찰해보니, 귀란 인간의 다른 기관에 비해 형태상 아주 불가해한 구석이 있었다. 여기저기가 불합리하게 구불구불 구부러져 있고, 쑥 들어갔다가 툭 튀어나와 있기도 하였다. 진화의 과정에서 소리를 모으거나 방어하는 기능을 추구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그렇듯 불가사의한 외관을 취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뒤틀어진 벽에 둘러싸여 귓구멍이 하나, 비밀스런 동굴로 통하는 입구처럼 어둡게 뚫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귀에 소굴을 친 작은 파리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여섯 개 다리에 달콤한 꽃가루를 잔뜩 묻히고, 그녀의 눅눅한 암흑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 엷은 분홍빛 부드러운 살을 파먹고, 즙을 빨고, 뇌 속에 조그만 알을 낳는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날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제 됐어."
나는 말했다.
사촌 동생은 빙글 몸을 돌려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때? 어디 이상한 데 있었어?"
"밖에서 보기에는 별 이상 없는 것 같은데."
"좀 이상한 분위기라든가, 그런 정도라도 괜찮은데."
"그냥 보통 귀야."
사촌 동생은 실망한 듯이 보였다. 내가 말을 잘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치료할 때 아팠니?"
내가 질문해 보았다.
"아니 별로. 지금까지 받았던 치료랑 똑같았어. 비슷한 데를 비슷하게 휘저으니까. 지금은 그 부분이 닳아빠진 듯 한 기분이야. 가끔은, 내 귀란 느낌조차 들지 않아."
"28번."
잠시 후에 사촌 동생이 내 쪽을 보고 말했다.
"28번 버스 타면 되지?"
나는 줄곧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말에 얼굴을 들자, 버스가 속도를 떨구고 오르막길을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아까 탔던 신형버스가 아니라 낯익은 구형버스다. 정면에 '28'이란 번호판이 걸려 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그런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마치 거센 흐름의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손발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그 때, 그 여름 오후 문병 때 들고 갔던 초콜릿 상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신나는 표정으로 상자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열두 개의 조그만 초콜릿은 모양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녹아, 포장지와 뚜껑에 찐득찐득 들러붙어 있었다. 나와 친구는 병원에 가는 도중, 해안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모래사장에 뒹굴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 동안 우리는 초콜릿 상자를 강렬한 8월의 햇살 아래 그냥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초콜릿은 우리의 부주의와 오만함 때문에 손상되고 형태를 잃고, 상실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일에 대해 무언가를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쪽이라도 좋았다. 누구든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는 말을 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 오후, 우리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쓰잘데 없는 농담만 주고받다 그대로 헤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언덕을, 장님 버드나무가 무성한 채로 그냥 방치하고 만 것이다.
사촌 동생이 내 오른팔을 세게 잡았다.
"괜찮아 형?"
사촌 동생이 물었다.
나는 의식을 현실로 되돌리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제대로 일어날 수 있었다. 불어오는 5월의 포근한 바람은 다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아주 짧은 시간, 몇 초 동안, 어둠이 희미하게 깔린 기묘한 장소에 서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장소에, 그러나 마침내 눈앞에 현실인 28번 버스가 멈추고 그 현실의 문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올라타, 어딘가 다른 장소로 향하게 된다.
나는 사촌 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
내가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