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하루키

비밀에 싸인 양복 공장

chocohuh 2020. 11. 25. 09:11

하느님도,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리고 집사람도 모두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나는 옷차림에 그다지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여름에는 티셔츠에 반바지, 봄가을에는 리바이스 청바지에 트레이너나 스웨터를 입고, 겨울이 되면 그 위에 가죽점퍼나, 프레스의 더플코트를 입는다.

 

신발은 나이키 조깅화.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 같은 것은 가뭄에 콩나듯 밖에 입지 않기 때문에 유행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브룩스 브라더즈 라든가 폴 스튜어트 같은 곳에서 산다. 가죽 구두는 일단 갈색과 검정색 리갈의 윙팁을 한 켤레씩 갖고 있는데, 이것들은 폐기된 원자력선처럼 벽장 구석에서 꼼짝 않고 잠을 자고 있다. 이것이 내가 기본적으로 소유한 의상이다.

 

'혹시 어쩌면'하고 여러분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기본적인 소유 의상 스타일이 1970년 이래 전혀 변화되지 않은 것 아닐까?'하고. 정답, 그대로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물론 자질구레한 변화는 있다. 컨버스 스니커는 나이키 조깅화로 바뀌었고, VAN 자켓은 폴 스튜어트로 바뀌었고... 등등.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하나도 달라질 것이 없다. 지난 15년 동안 영화관에서 보는 액션 영화의 예고편 같은 속도로 여러 가지 패션 스타일이 생겨났다가는 사라져 갔으나, 나는 그 동안 북쪽 나라 숲의 사슴처럼 진화와는 무관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1970년대의 나의 기본적인 소유 의상과 1986년도의 나의 기본적인 소유 의상 사이에는, 대충 라이처스 브라더즈와 홀 앤 오츠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보수적인가?"하고 물어오면 곤란하다. 나로서는 결코 적극적인 무엇인가를 보수하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정도면 괜찮겠지'하고 일단 PAUSE 버튼을 눌러 놓은 것뿐이지, 특별히 유행을 거슬러 가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행하는 옷을 제대로 찾아 입는 것은 꽤 신경이 쓰이는 일이며(물론 돈도 많이 들어간다.), 그것보다는 나는 스포츠를 하거나 식생활을 생각하거나 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신체적인 면에서의 자기 관리 쪽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쪽인데, 이것은 개인적인 성향 문제여서, 어느 쪽이 옳고 뛰어나다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철학을 통해서 자기 관리를 하는 사람도 있고 양복을 통해서 자기 관리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것은 어차피 개인적인 문제다. 그리고 내가 최첨단의 옷을 입지 않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자주 외국을 여행하게 되었다는데 있다. 대도시의 상류사회에라도 가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외국의 보통 도시를 보통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복장은 일본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뒤떨어진다.

 

낡은 양복이거나 어딘가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이라도, '그런 거에다 신경 쓰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하는 식으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라는 것을-이상한 일이지만-나는 외국에서 처음 알았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지저분한 모습을 하고 가는 사람인데, 그래도 현지에 도착해보면 주위 사람들에 비해서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해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과는 정반대로, 일본에 돌아오면 한 동안은 주위 사람들이 너무나 말쑥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런 것을 몇 번씩 되풀이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 틈엔가, '아무러면 어떠냐?' 하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비진화라는 기분 좋은 나무 열매를 태평스럽게 따먹으며 나이를 먹어가게 될 것이다.

 

 

꽤 길게 '비 진화'의 측면을 이야기했으니까, 이쯤에서 '진화'의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양복에 있어서 진화란 무엇인가?(예증)

 

"파리에 우리(꼼므 데 갸르송) 회사가 있는데, 그곳의 사장은 프랑스인 여성입니다. 그 나라는 프랑스인이 사장이 아니면 회사를 세울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녀는 그때까지 전혀 다른 타입의 오뜨 꾸뛰르(최신 유행의 고급 맞춤복-역주)계의 회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단정하게 구김살 하나 없는 옷을 입고, 매일 미용실에 다니는 생활을 했죠. 그런데 그것이 우리 회사의 옷만을 입게 되고, 역시 여러 가지 감화를 받았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입던 양복을 전부 내버릴 정도가 되었답니다. 생활도 여러 면에서 확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옷은 내추럴 해지면 자연히 짙은 화장 같은 것은 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상하게 허세를 부리는 복장이나 집과도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꼼므 데 갸르송 홍보담당 다케다씨)

 

과연 그렇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한다. 특별히 "꼼므 데 갸르송'의 편을 드는 것은 아니지만 다케다 씨가 하는 말은 나도 납득이 간다. 1960년대 말기에 청춘을 보낸 사람이라면, ",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녹색 혁명'과 같은 것이냐?" 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 옛날, "내추럴(자연)한 것이 최고예요" 하고 말하며 마하트마 간디가 끼던 것 같은 안경을 끼고, 누덕누덕 떨어진 탱크톱과 가위로 난도질한 청바지 차림으로 철사줄이 들어 있는 브레지어를 불태워 버리던 아가씨들(그렇다고 실제로 그런 광경을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이 사라져 버리고 난지 어언 15, 그녀들의 정신은 우아하게 승화되어서 미나미 아오야마의 화려한 양장점에 장식되게 된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나는 결코 그러한 현상을 꼬집거나 야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런 것이다' 하는 것이 나의 기본 방침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크리에이터, 매뉴팩처리)이 존재하고, '그것'을 구하는 소비자층이 존재한다. 이것은 하나의 현상이며, 나는 원칙적으로 모든 현상은 선이라고 믿고 있다. 선이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강렬하다면, 거기에 '내추럴'이라는 색채를 추가하면 좋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현상을 긍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현상을 긍정 혹은 부정을 초월해서, 스스로의 연장물로 파악하는 것이다.

 

 

좋다. '꼼므 데 갸르송'을 나 자신의 연장물로 파악해보자.

 

그래서 나는 실제로 시부야 세이부 백화점에 있는 꼼므 데 갸르송 옴므(남성복) 부티크에서 여름용 재킷과 티셔츠를 사왔다. 티셔츠는 둘째 치고, 재킷 쪽은 종래의 내 스타일과 완전히 딴판이다. 어깨에 커다란 패드가 들어가서 옆으로 삐져나오고, 옷깃에 파이핑이 들어갔다. '완전히 서커스단의 원숭이 꼴 아닌가!'하고 생각했지만, 함께 있던 집사람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나쁘지는 않아요." 하고 말해서, 모든 것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샀다. 두 가지 합쳐서 6만 엔쯤 했는데, 하여간 싸지는 않다. 이런 취재를 하는 데도 꽤 경비가 들어간다.

 

부티크의 점원(남자)은 상당히 인상이 좋은 사람이어서, 나같이 완전히 수준이 다른 사람이 매장 안에 들어가도 싫어하지 않고-속으로는 싫어했는지도 모르지만-친절하게 상담에 응해주었다.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고 모나지 않게 솔직한 의견을 말해주고... 요컨대 내추럴하다. 아마도 종업원 교육이 잘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감탄했다.

 

다케다 씨는 최초의 취재(라기보다는 면접, 초보적 강의)를 하던 중에, "매장의 최전선에 서있는 사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점원들을 보고 옷을 입는 법이나 스타일을 판단하는 손님 다 있으니까요" 하는 의미의 말을 했는데, 내가 보는 한에서는, 그런 면의 배려는 아주 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재킷 말인데, 몇 번식이나 착용해보면 세밀한 부분을 테스트해 보았더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재킷은 겉보기에 디자인이 참신한 것 치고는-그다지 참신하지 않은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참신했다-실제로 입어 보니까, 쉽게 몸에 익숙해지고, 피로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좀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오래 입으면 입을수록 그 디자인의 신기함이 그다지 마음에 걸리지 않게 되었다. 다케다 씨의 강의 때문에 세뇌당한 것은 아니지만, 부단히 '내추럴'한 경향을 인정할 수 있다. 소매에 팔을 집어넣을 때까지는 '꼼므 데 갸르송' 양복은 상당히 멋을 내서 무리하게 입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착용해보니까 의외로 무리가 없는 옷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런 점에서 상당히 감탄을 했다. 단 한벌의 재킷에서 모든 것을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이것에 관한한 어떤 종류의 일관된 사상 같은 것이 느껴지는 옷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상

 

조금 전의 녹색 혁명의 이야기로 돌아가는데, 나는 1980년대 후반을 움직이는 새로운 이념의 대다수는 1960년대 후반에 볼 수 있었던 급진주의, 반항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자연식 지향, 육체적안 건강, 혼경 음악, 좌익 체제파의 해체, '순문학주의' 통치의 유명무실화, 사회 구조의 수직성과 수평성의 분화... 그러한 것들의 모든 원형은 1960년대 후반에 심각한 형태로 제출되었던 것이며, 70년대에는 동결되거나 물 밑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80년대에 들어서자 얼마 뒤 부드러운 현실의 진행이 되어서 표면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때를 같이해서, '우리들 60년대 세대가 그것은 상품화 할 권리를 지닌 지위로 상승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그러한 '부드러운 급진주의'적 상품이 충만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꼼므 데 갸르송의 옷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 '부드러운 급진주의' 분야의 일원으로 추가해도 틀림이 없지 않을까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문제의 꼼므 데 갸르송을 둘러싼 됴시모토=하니야 논쟁에서도 그 나름대로의 필연성을 찾을 수 있다. , 반핵과 꼼므 데 갸르송을 동일선상에 두고 논하는 것은 결코 부자연스런 작업이 아닌 것이다. 나의 논리대로 나간다면, 꼼므 데 갸르송이 우리들 자신의 연장이라면, 핵무기 또한 우리들 자신의 연장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야기를 좀 더 현실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려 보자.

 

꼼므 데 갸르송이라는 회사는 비밀주의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취재를 상당히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내가 그 공장을 견학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매스컴 관계에 있는 분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야"라며 이구동성으로 말했고, 사실 꼼므 데 갸르송 측도 "그건 좀 곤란합니다."고 대답했다. 교섭은, '어째서 곤란한가?'하는 의문에서부터 출발했다. '어째서 공장을 보여주면 안 되는가?' 하고 창구인 홍보실의 다케다씨가 상대였다. 다케다 씨 쪽에도 의문은 있었다. '어째서 꼼므 데 갸르송인가?' 그것도 어째서 의미가 없으면 안되는가? 상품이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는가?'

 

'어째서 의미가 없으면 안 되는가? 꼼므 데 갸르송이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최첨단의 상품을 만드는 공장을 구경하고 싶다는 호기심을 품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필요한가?'

 

우리들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이 다케다씨라는 분이 대단히 인내심이 많고, 또한 논리적인 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절충을 계속하여 우리들의 사물에 대한 관점의 기본적인 스타일을 설명하고, 절대로 이면을 파헤치거나 흥미 위주로 놀려대거나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 했다. 우리들은 무엇인가를 긍정하거나 무엇인가를 부정하거나 하기 위해서 공장 견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고 싶은 것뿐이다. 그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다른 입장의 사람들-혹은 독자들-의 작업이라고.

 

그녀는 인내심 깊게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마침내는 이해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꼼므 데 갸르송의 봉제 공장에 들어가는 것을 최종적으로 허가받았던 것이다(하지만, 이것은 꼼므 데 갸르송과 나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덧붙여 두고 싶은데, 기사에 대한 제약은 두세 가지 세부사항은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사의 체크도 없었다. 나는 완전히 자유스러운 입장에서 이 문장을 쓰고 있다.)

 

꼼므 데 갸르송이 취재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케다씨의 말을 빌리면 그들이 지금까지 자신들에 대해서 쓰여 진 대부분의 기사에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나는 패션관계 잡지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읽지 않으니까, 그 분야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꼼므 데 갸르송은 일부로부터 '상당한 반발을 사고 있는' 모양이다. 과연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도 왠지 모르게 시건방지고, 사람을 피하는 것 같고 자신의 일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까(나의 인간적 특성과 비슷하다), 주위에는 상당히 반감을 가진 사람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상처를 입었다는 표현은 매우 재미있다. 개인이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들의 집합체인 회사라고 하는 시스템이 과연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을 수가 있을까?

 

 

나는 여기서 가와쿠보 레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뛰어난 디자이너를 정점으로 똘똘 뭉친 꼼므 데 갸르송이라는 집합체의 '부드럽고 내추럴한 자폐성'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지만, 이러한 표현도 어쩌면 그들=그녀들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용서해 주세요. 우선 간단한 수업. 꼼므 데 갸르송이라는 기업의 구조를 설명하겠다.

 

(1) 디자인

디자인은 가와쿠보 레이 여사가 혼자 전부 해낸다. 벌집으로 말하자면 여왕벌인 셈인데, 독자적인 섹션이다.

 

(2) 치프(주임)

이 사람이 가와쿠보 여사 직속의 생산부를 통괄하고 있다. 이 사람의 역할은 간단히 말하면 가와쿠보 여사가 그린 디자인을 현실적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치프 밑에 패터너와 생산 관리 부문이 있다.

 

(3) 패터너

가와쿠보 여사의 그림을 보고 실제로 그것을 만들어보는 사람이다. 인원 수는 전부 25명 가량 된다. 이미지화에서 실물을 만드는 셈이니까 상당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물론 가와쿠보 여사가 그것을 체크한다. 그것에 의해서 패턴(부품)의 수가 결정되고 본뜬 종이가 만들어진다. 도표로 그려보면, 이상과 같은 시스템이다.

 

(4) 생산관리

패터너가 쓴 봉제 지시에 따라서 옷감의 미터 수, 본뜨기(옷감에서 패턴 피스를 잘라내는 방법)등을 결정하고, 단추의 수, 심의 양같은 것을 체크하고, 이정도만 있으면 확실히 그 옷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단계까지 세팅하고, 그 세트를 공장까지 가지고 간다. 그리고 봉제된 제품을 체크한다.

 

(5) 공장

드디어 본론인 공장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우선 먼저 양해를 구해두고 싶은 것은, 특별히 꼼므 데 갸르송 공장이라는 특정 공장이 '마쓰시타 잔기 공장'이나 "하우스 식품 공장'과 같은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신예의 하이 테크놀러지컬한 공장에서 350명의 여공들이 가와쿠보 레이 여사가 디자인한 유니폼을 입고... 하는 식이면 꽤 재미있을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꼼므 데 갸르송은 디자인 제작과 영업부만 있는 회사여서, 실제의 봉제는 외부 봉제 공장에 '발주'하는 것이다.

 

공장의 규모는 가지각색이어서, 큰 곳은 전부 기계화되어 있고, 작은 곳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시간제 근무를 하는 아주머니로 구성된 가내 공업적인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공장에 따라서는 꼼므 데 갸르송 이외의 메이커의 제품도 동시에 만들고 있는 곳도 있으며(대형 공장에 많다), 꼼므 데 갸르송의 옷밖에 만들지 않는 곳도 있다(소형 공장에 많다). 공장 수는 약 20개 정도지만, 그 숫자는 계절에 따라 변화한다. 가령 꼼므 데 갸르송은 올 추동 시즌에 재킷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재킷 관계 옷을 잘 만드는 공장에 발주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한국이나 대만과 같은 외국 공장에 봉제가 발주되는 일은 없다. 그 이유는 첫째, 디자인 당 상품의 생산 수가 상당히 적기 때문에 외국에 발주할 메리트가 없다. 둘째, 봉제 지시와 체크가 세밀하기 때문에 공장이 가까이에 없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 업계 쪽으로 가까운 언론 관계의 친지가, "꼼므 데 갸르송의 옷들은 대부분 한국제 아닙니까?"하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밖의 '꼼므 데 갸르송 정보'에는 이러한 것도 있다.

 

(1) 꼼므 데 갸르송의 옷은 잘난 체하고 떠들어대도 고토구 근처에 있는 가내 공장에서 만들고 있다고.

(2) 그런 아무것도 아닌 옷에 '꼼므 데 갸르송'이라는 상표를 붙이기만 해도 비싼 가격이 붙는 다니까.

 

아마 꼼므 데 갸르송의 다케다 씨가 우리들에 대해서 처음에는 상당히 경계했던 것도 어쩌면 그러한 비난을 우려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있는 일 없는 일을 싸잡아서 비난을 당하는 것이 유명 인사, 아니 '유명 집합체'의 숙명인 것이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면, (1)의 소문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안내되어 간 곳은 고토 구 모처에 있는 가내 공장이었다. (2)의 소문에 대해서는, 나는 실제로 현장에서 원가 계산을 한 것이 아니니까, 그 소문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여기서 명확히 말할 수는 없다. 대충 느낌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이 글을 읽고서 독자 여러분이 판단해주세요.

 

미야시타(가명)씨의 공장은 고토 구 모처에 있다. 가명이나 모처라고 하는 것은 꼼므 데 갸르송 측이 정확하게 쓰지 말아달라고 희망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업계도 상당히 경쟁이 심해서'이며, 요컨대 직공을 빼가는 일이 있거나, 정보 누설 같은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

 

공장이라고 해도, 솔직히 말한다면, 변두리에 있는 보통 집이다. 문은 좁고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 바로 옆이 경사가 급한 계단으로 되어 있다. 문에는 다만 '미야시타'라고 씌어 있는 문패가 붙어 있을 뿐이니까, 이곳이 꼼므 데 갸르송의 옷을 만들고 있는 공장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마치(나폴레옹 솔로)에 나왔던 UNCLE의 비밀 본부의 입구 같은 느낌이다. 본서에서 취재한 공장 가운데서는 가장 작은 공장이다.

 

1층 부분은 미야시타 씨가 사는 집으로 되어 있고, 2층이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4평과 3평짜리 방이 L자 모양으로 이어져 있는 정도의 넓이로. 그 밖이 빨래를 말리는 대이다. 빨래 말리는 대에는 토마토 같은 것이 재배되고 있다. 그 너머로 이웃집의 창문이 보인다. 어딘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내가 옛날에 한동안 더부살이를 하던 분쿄쿠에 있는 처갓집 분위기와 약간 비슷하다.

 

방 한쪽 구석에는 미야시타 씨가 옷감을 본뜬 종이대로 잘라내는 재단용 작업대가 있고, 그 옆에 그의 부인과 시간제로 일하는 아주머니 A씨가 천에 스팀다리미질을 하는 작업대가 있고, 빨랫대에 면한 재봉틀 두 대 앞에는 미야시타 씨의 며느리와 시간제로 일하는 아주머니 B씨가 앉아서 부지런히 재단된 천을 재봉질하고 있다. 덜컹덜컹하는 재봉틀 소리와 쉭쉭 하는 스팀다리미 소리가 뒤섞여 꽤 기분좋은 분위기이다. 왠지 1950년대로 '백 투 더 퓨처'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공장은 정말로 오래간만에 본다. 누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공장은 요즘 참으로 찾아보기 힘드니까.

 

하루키: 일하고 있는 사람은 이분들이 전부입니까?

미야시타: 아닙니다. 시아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사람이지요. 여기서는 일하지 않지만요. 그리고 단춧구멍, 이것은 기계로 파니까 전문 단추 공장에서 해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만든 옷에는 단추가 아직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프레스 다리미질을 하지요. 이렇게 큰 기계로 쾅쾅하고 끼워넣고 합니다. 프레스도 꼼므 데 갸르송의 경우는 납작하게 누르는 프레스도 있고, '아라이'라고 해서 일부러 주름을 내는 프레스도 있고, 여러 가지입니다.

 

하루키: 지금 여자용 재킷을 만들고 계시는데, 미야시타 씨는 계속 이런 옷을 만들어 오셨습니까?

미야시타: 아닙니다. 나는 이전에는 신사복을 만들었지만, 신사복을 만들 수 없게 되어서 여성복으로 바꾼 것입니다. 전후에는 한때 신사복이 엄청나게 경기가 좋았습니다. 다만 신사복은 회전이 빠르지 않잖습니까. 게다가 경쟁이 심하고요-요컨대 누구나 만들 수가 있지요, 직공이라면요. 그래서 직공이 모두 신사복에 몰려들어서 이익이 적어지는 겁니다. 대만이나 한국에 발주한다고 해서, 우리들로서는 할 수 없이 부인복으로 방향을 바꾼 겁니다.

 

하루키: 어떻습니까,꼼므 데 갸르송의 일은 재미있습니까?

미야시타: 나는 말이죠 재미가...있다고 할까요, 매일이 일종의 발견입니다. 그야 물론 우리들은 디자이너가 발견한 것을 뒤에서 따라가고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그곳까지 도달하는 것이 하나의 발견이니까요. 그곳에 기쁨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루키: 본뜬 종이가 내려왔을 때 얼핏 보고, '이런 기묘한 것을 만들어서 과연 팔릴까?'하고 생각할 때는 없습니까?

미야시카: 글쎄요, 우리들도 만들면서 어떻게 입을까, 별 기발한 옷도 다 있군, 하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모델들이 입고 있는 것을 보면, 그다지 기발한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그래서 한번쯤 쇼를 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면 으음 그럴듯하군, 하고 납득이 갑니다. 디자이너는 역시 그 나름대로 머리가 좋다고 말입니다(웃음).

 

하루키: 기발한 것이라면 상당히 기발한 것이 있었겠지요?

미야시타: ,최근에는 그다지 심하지 않지만, 한때는 그야 말로 난처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등에 절구 같은 것을 짊어지는 옷이 다 있었다니까요.

다케다: (옆에 있다가 설명을 했다) 그때 우연히 가와쿠보씨가 입체감이 있는 양복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옷을 입었을 때 울퉁불퉁한,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을 만들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것이라든가 옷의 속면 일부가 잇대어 붙여져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든가요. 그러한 디자인이 많았으니까 그 무렵에는 정말로 애를 먹었습니다.

미야시타: 그런데,처음 얼마 동안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만드니까 잘되는데요. 순서를 대강 외우고, 빨리 만들려고 서둘러서 한건 절반이나 퇴짜를 맞았지요.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 반대로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해서요. 괴수가 산을 짊어지고 있는 그림 있지요? 그런 식으로 되어버려서...

 

하루키: 일한 보람이 없었겠네요.

다케다: 그런 말은 쓰지 마세요(웃음).

 

미야시타 씨는 전후부터 줄기차게 계속해서 양복 직공으로 일해 온 싹싹한 아저씨로, 이야기도 꽤 재미있게 한다. 꼼므 데 갸르송 본사의 점잔을 빼는 분위기에 비하면 전혀 이미지가 맞지 않는 분이지만, 일을 하는 것이 더없이 즐겁다는 타입의, 그것도 새로운 옷이나 복잡한 옷을 만드는 것이 즐거워서 못 견디겠다는 타입의 사람이어서, 옆에서 보고 있으면, '과연 이러한 사람들이 꼼므 데 갸르송을 뒤에서 지탱해나가고 있구나!' 하고 어느 정도 납득이 가곤 한다. 거꾸로 말하면 이러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도 디자이너스 브랜드에서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장은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일단 쉬지만, 미야시타 씨는 쉬는 날에 혼자 다음 1주일분의 작업 준비를 해놓고,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세트해 놓는다고 한다. 구석구석까지 깨끗이 해놓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격의 사람의 모양으로, 과연 공장에서 작업의 진행 상황이 매우 매끄럽고, 소수의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전해져 왔다.

 

하루키: 지금 만들고 있는 재킷은 본뜬 종이로 몇 피스 정도로 나뉘어져 있습니까?

미야시타: 이건 23매 입니다.

하루키: 많군요.

미야시타: 보통의 두 배는 됩니다. 보통의 경우는 대개... 10매 이하지요. 대충 필요한 곳을 들어보면, 전신이 있어야겠죠. 그 다음은 등, 소매가 상하, 안단, 그리고 깃. 그 다음은 주머니 모양 정도니까요. 7, 8매면 됩니다. 그러니까 재단할 때도 이렇게 겹쳐서 한 번으로 좌우를 떠 낼 수가 있거든요. 보통의 경우에는요. 하지만 꼼므 데 갸르숑은 전부 늘어놓고 한 개씩 잘라나가지 않으면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죠. 하지만 세밀한 일에...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대충.

 

하루키: 나는 잘 모르지만 재단이라는 것은 가위로 합니까, 싹뚝싹뚝하고요?

미야시타: 아닙니다. 재단기라는 기계를 사용합니다. 이겁니다(꺼내 가지고 온다. 대형 주스기만한 크기의 기계이다). 이걸로 천을 사이에 끼워 자릅니다. 안감 같은 것은 이런 칼로 자릅니다. 이것 말인데(하면서 녹색 천으로 싸놓은 칼 세트를 꺼낸다). 옛날에는 모두 이걸로 잘랐습니다. 그러니까 1950년대까지는 이것으로 했지요. 1965년 정도부터 기계가 들어왔으니까요.

 

하루키: 그렇다면 기계화된 부분도 있다는 얘기군요. 65년이라면 도쿄 올림픽 이듬해...

미야시타: 그리고 '에리사시'라고, 이렇게 옷깃이 접히도록 심과 이 옷깃을 고정시키는 걸 지금은 접착제를 사용해서 이런 식으로 합니다만 옛날에는 '하자시'라고 해서. 전부 손으로 했었지요. '에리사시'라는 기계가 들어온 것도 역시 65년경부터지요.

 

하루키: 다림질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미야시타: 다림질은 이런 식으로 꼬맨 것을, 그 감을 가라앉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꼬매고 나서 다림질을 해서 천을 가라앉히는 겁니다. 금세 다림질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림질을 하기가 어렵게 되니까요. 필요한 부분까지 꼬매고 필요한 자리가 되면 다림질을 하고, 그것을 교대로 되풀이하면서 일이 진행되는 겁니다. 그것이 커다란 공장 같으면 쉬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주머니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주머니의 다림질을 준비할 뿐이고, 그것이 끝나면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다음에 가면 다마부치(천의 가장자리에 재봉으로 다른 천의 테두리를 대는 일-역주)를 하고 있고, 그리고 다시 다음으로 가면 뚜껑을 끼는 사람은 끼기만 합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같은 일만 하게 되는...

 

하루키: 그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주머니의 뚜껑을 끼는 것뿐이라면 요. 여기서는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공정을 맡아서 하고 있는 셈이군요.

미야시타: 그렇습니다. 일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다가는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큰 공장에 가면, 그건 솔직히 말해서 바보라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일만 할 줄 알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공장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다가는 주머니만 생겨나게 되니까, 쓸모가 없게 되지요(웃음). 그러니까 이런 얘기입니다. 본이 20피스 정도 있다고 하는 것은 20번 정도를 갔다가는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의 생산량 말입니까? 어려운 이야기이지요. 간단한 옷이라면 상당히 많이 만듭니다. 하지만 혼자 해야 하니까 두 벌 만들면 잘 하는 편 아니겠습니까? 이런 옷은 품이 많이 가니까요. 혼자서 두 벌이니까 다섯 명이서 열 벌... 정도 만들면 좋겠는데 그렇게까지는 아직 못 만듭니다. 하여간 어떻게든 두 벌 정도는 만들어야겠다고 노력하는데...

 

하루키: 이렇게 '이런 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본뜬 종이와 봉제 지시서가 내려오지요. 그때, 이것은 팔릴 것이라든가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육감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까?

미야시타: 그것은... 나도 상상을 해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회사의 비밀이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만들면서 이거 괜찮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영업부에서 다시 매수가 들어오면, 아아 역시 많이 팔리는구나 하고...

 

하루키: 매수가 들어온다뇨?

다케다: (옆에서 설명을 했다) 한 공장에 그 공장에 갈 것이라고 생각되는 스타일의 옷을 주문하는 것입니다. 전시회나 패션쇼를 열기 전에요. 그래서 전시회 같은 곳에서 손님으로부터 주문이 들어와, 그 주문에 따라 생산 매수가 정해지게 되는데, 그것이 다시 미야시타 씨의 공장에 되돌아오니까 그때, ', 이 스타일은 20매 들어왔다, 이것은 30매 들어왔다.'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미야시타: 하여간 모든 것이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요. 회사나 사장님 자신도 어느 정도나 팔릴지는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팔리지 않더라도 만들고 싶은 것이 있을 거고요. 우리들도, '어딘가 기발한 구석이 있구나, 재미있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어요. 그러니까 꼼므 데 갸르숑은 그런 점이 좋지 않습니까? 나도요, 아니 우리 공장 종업원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떤 식으로 옷이 만들어져 갈까 하는, 하나의 관심, 그러한 것이 일을 열심히 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요?

 

하루키: 가족들은 꼼므 데 갸르숑의 옷을 입고 있습니까?

미야시타: 우리 집에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만, 꼼므 데 갸르숑을 입을 만큼 스타일이 좋지 않아서요(웃음). 우리 집 바로 옆에요, 꼼므 데 갸르숑의 열렬한 팬이라는 아가씨가 하나 있기는 있어요. 그리고 여행을 가서요, 무슨무슨 관광단 같은 것을 따라가서,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부탁을 받고, 나는 꼼므 데 갸르숑의 옷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면 역시 젊은 여자들이... 우와 하고 소리치며 좋아들 하죠. 그러면 나도 기분이 좋아서 술을 따라주기도 하고... (*이 대목은, 꼼므 데 갸르숑의 내추럴 사상에서 좀 일탈해 있는 것 같지만 미야시타 씨는 매일 열심히 일을 하고 있으니까 여행 때 정도는 눈감아주시기 바랍니다.)

 

하루키: 마음에 드는 것이 완성되면, 옷 속의 눈에 안 띄는 곳에 이름을 새겨두는 일 같은 건 없습니까?

미야시타: 사장님한테 호되게 꾸중을 들으려고요(웃음)? 그러니까 신사복 같은 경우에는 심에다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어요, 심에다 쓰면 완성되고 나면 전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옛날에는 그런 은밀한 자만심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이전에는 그런 장인 근성 같은 것이 있었지요.

 

하루키: 이 펀치는 무엇에 쓰는 겁니까? 무엇을 말릴 때라도?

미야시타: , 그것은 상관없는 거예요. 우리 집 빨래인데 비가 내려서 세탁물을 집 안에 널어둔 것뿐입니다. (미야시타 씨의 부인과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주머니 모두 킥킥거리고 웃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지금까지의 경우는 도매상이 요컨대 디자이너를 고용했습니다. 1주일에 한 번 무슨 요일은 우리 회사에서라든가, 하고 고문으로 고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디자이너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디자이너라고 해도 다만 본뜬 종이만 만들 뿐, 다른 특별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령 꼼므 데 갸르숑 말입니다. 가와쿠보 레이 씨라는 디자이너가, 디자이너 자신이 직접 운영해나가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디자이너가 지금까지는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고 디자이너 자신이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만들고 싶은 옷을 만들면, 그것에 흥미를 느낀 사람이 그 사람 주변으로 모여드는 겁니다.

 

이런 연유로 '꼼므 데 갸르숑'의 재킷에 미야시타 씨의 서명은 들어가 있지 않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미야시타 씨는 즐거운 듯이 꼼므 데 갸르숑의 재킷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것을 보고 있으려니까, 나도 '소중하게 재킷을 입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꼼므 데 갸르숑이라는 브랜드의 부가가치가 가격에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에 대해서 다케다 씨에게 물어보니까, "우리 회사 정도의 생산 매수로 그렇게 품이 많이 드는 공정을 거치자면 아무래도 단가가 높아집니다. 원단도 오리지널이어서 코스트가 높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그 정도의 가격이 되는 겁니다."라는 것이다. 적어도 재킷에 관해서 말한다면, 아마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다른 품목에 대해서는 내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꼼므 데 갸르숑의 경영 자세는 전체적으로 상당히 견실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의복 브랜드에서 경영하는 레스토랑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텅 비어 있는데다가 첫째 대부분의 레스토랑이 맛이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 그런 공허한 다각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쨌든 간에 하나의 '품위'라고 나는-개인적으로-생각한다.

 

"업계의 이중 구조라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고 다케다씨는 말했다. 요컨대, 독자적으로 디자인한 것을 한 벌 한 벌 만들어나가는, 이른바 '디자이너 브랜드'와는 별도로 보통 공장에서 왕창 만들어놓고 그것에 브랜드 네임을 붙여 팔면서 그쪽에서 돈을 버는 수법이다. 결국은 어느 정도까지 그것을 용납하느냐, 혹은 용납 못하고 소량 생산하느냐, 하는 것이 경영자의 자세와 프라이드에 의해 갈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가 그것을 상품 속에서 구별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