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분류 전체보기 2672

런어웨이

가출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가출하는 것'이란 자각부터 가지는 일이다. 이것이 없으면 아프리카에 가도, 남극에 가도 단순한 여행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또 그 자각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서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가출하더라도 당신의 가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이미 반대로 이미 가출에 성공한 타인이 당신에게 '권리를 양도한다.' 라고 말해도 성립되지 않는다. 가출을 했다, 라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는 한 당신이 모처럼 가출을 했다 해도 정말로 한 것이 아니다. 다음에 가출을 하기 위해서는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정원의 유무, 새로 지은 집인지 중고인지, 역에서 몇 분 정도 걸리는지 등등의 요소는 물론이고, 또 그것이 세들어 사는 집이든 방이든 아..

1963년. 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햇볕에 그을리고 날씬하며 앳되고 예쁜 이파네마 아가씨가 걸어간다. 걸음걸이는 삼바 리듬 경쾌하게 흔들며 부드럽게 움직인다. 좋아한다 말하고 싶지만 내 마음을 주고 싶지만 그녀는 내가 있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그저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뿐 1963년에 이파네마 아가씨는 이런 식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역시 마찬가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그 이후로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지 속에 갇힌 채, 시간의 바닷속을 조용히 떠돌도 있다. 만일 나이를 먹었다면, 그녀는 이제 그럭저럭 마흔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날씬하지도 않을 테고, 그다지 햇볕에 그을려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미 어..

스파게티 공장의 비밀

그들은 나의 서재를 스파게티 공장이라 부른다. '그들'이란 양사나이와 아리따운 쌍둥이 소녀를 일컫는다. 스파게티 공장이란 말에 대단한 의미는 없다. 끓인 물의 온도를 조절하거나, 소금을 뿌리거나, 타이머를 작동시키거나, 그런 정도이다. 내가 원고를 쓰고 있노라니, 양사나이가 두 귀를 쫑긋쫑긋 거리며 다가온다. "있잖아, 우린 아무래도 그 문장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런가?" 하고 나는 말한다. "어쩐지 주제넘은 것 같고, 유익한 게 없잖아." "흐음." 하고 나는 말한다. 정말이지 난 고생하며 쓴 문장이다. "소금을 좀 많이 뿌린 게지." 하고 쌍둥이 중 208쪽이 말한다. "새로 만들기." 하고 209가 말한다. "우리도 거들께." 라고 양사나이가 말한다. "아니 됐어." 양사나이가 도와주면 무엇이든..

캥거루 통신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휴일이라서, 아침나절에 근처 동물원으로 캥거루 구경을 다녀왔습니다. 별로 큰 동물원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고릴라를 비롯해서 코끼리까지 대강의 동물은 그럭저럭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라마라든가 개미핥기의 팬이라고 한다면, 아마 그 동물원에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거기엔 라마도 개미핥기도 없답니다. 임팔라도 하이에나도 없답니다. 표범조차 없답니다. 그 대신 캥거루가 네 마리 있습니다. 한 마리는 새끼인데, 태어난 지 2개월밖에 안되었답니다. 그리고 수놈 한 마리에 암놈 두 마리. 도대체 어떤 가족 구성으로 된 것인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캥거루를 볼 때마다, 도대체 캥거루로 있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하고 항상 궁금해집니다. 그들은 도대..

거울 속의 저녁노을

우리는(우리라 함은 물론 나와 개를 말한다.)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서 오두막을 나왔다. 내가 베개 맡에 앉아서 1963년도 판 조선(造船) 연감을 소리 내어 읽고 있는 사이에(그 외에 오두막 안에는 책이라고는 없었다) 아이들은 금세 잠에 빠져 들어 나직이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총 배수량 23652톤, 전체 높이 37.63미터......' 따위 문자를 읊고 있으면 제 아무리 코끼리 떼라 해도 잠들어 버린다. "저 주인어른." 하고 개가 말했다. "산책이라도 하러 나가요. 오늘 밤은 달님이 무척 아름다워요." "좋고말고." 이처럼 나는 말을 할 줄 아는 개와 생활하고 있다. 물론 말을 할 줄 아는 개는 극히 드물다. 말을 할 줄 아는 개와 살기 전에는 나는 마누라와 함께 살았다. 작년 봄, 시내..

32살의 데이트리퍼

내가 32이고, 그녀는 18이고.. 이러면 아무래도 진부한 표현이 될 수밖에 없다. 난 아직 32이고, 그녀는 벌써 18....아,,그래, 좋아,,, 이거다. 우린 그저 그런 단지 친구 사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겐 아내가 있고, 그녀에겐 남자 친구가 여섯 명이나 있다. 그녀는 주말마다 6명의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한달에 한번씩 일요일엔 나와 데이트를 한다. 그 외 일요일엔 텔레비전을 본다. 텔레비전을 볼 때의 그녀는 너무 귀엽다. 그녀는 1963년생인데, 그해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난 처음으로 여자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유행하던 노래는 클리프 리처드의 '썸머 홀리데이'였던가? 뭐...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튼 그 해 그녀는 태어났다. 그해에..

겨울 박물관으로서의 포르노지

섹스, 성행위, 성교, 교합, 그 외 뭐라고 해도 좋지만, 그런 말이나 행위, 현상에서 내가 상상 하는 것은 언제나 겨울 박물관이다. 겨울의 박물관...... 물론 섹스에서 겨울 박물관에 이르기까지에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몇 번인가 지하철을 갈아타고, 빌딩의 지하도를 빠져 나가거나, 어딘 가에서 계절을 지나 보내거나, 뭐 그런 수고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런 귀찮음은 처음 시작할 때 몇 번뿐이고, 그런 의식의 회로에 한 번 익숙해지면 누구라도 '앗' 하는 순간에 겨울 박물관에 다다른다. 거짓말이 아니고, 정말 그렇다. 섹스가 거리의 화제가 되고, 교접의 물결이 어둠을 채울 때 나는 언제나 겨울 박물관의 현관에 서 있다. 나는 모자를 걸고, 코트를 걸고, 장갑을 책상 구석에 겹쳐놓고, 그리고 목도리를 ..

굿 뉴스

안녕하세요, 여러분. 열시 뉴스입니다. 오늘 밤에는 특별 기획으로 아주 좋은 뉴스만을 골라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나쁜 뉴스는 없습니다. 안심하여 주십시오. 마음이 따뜻해질 훈훈한 좋은 뉴스만 전해 드리겠습니다. * 멕시코의 대형 탱커 '쉐라 마들레 호'가 오늘 아침 새벽, 치바 앞바다에서 원인 불명의 돌발적인 폭발로 침몰했습니다. 그러나 밤까지 승무원 120명 중 35명이 기적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구출된 승무원들은 저마다 해상 보안청의 훌륭한 솜씨에 대해 감탄의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다행이죠? '버리는 신이 있으면 줍는 신도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야기일 겁니다. * 지난 주 금요일에 도쿄도 분쿄구 오토와 2가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도쿠시마 후에(72세)씨의 귓불을 가위로 자르고 도망쳤던..

엘리트

내가 어제 선을 본 상대는 엘리트였다. 물론 최종 학력은 '동경대학 졸업'이었다. 본인은 '변변치 않은 학교를 나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손끝에 은행나무 잎사귀 뱃지를 가지고 만지작거리고 있어서 알게 되었다. 우리들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했다. 날씨가 조금 추워서 어깨를 움츠리자 그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서 나에게 걸쳐줬다. 옷 속에는 '바바리'마크가 선명히 찍혀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신일본 제철의 간부였다. 이 사실을 내 직감으로 알아냈다. '무척 머리가 좋군요.'라며 그는 웃었다. 그도 감각이 뛰어난 편이었다. 어떻게 내가 미용사인지를 잘 알아맞혔던 것이다. 그는 엘리트라고 내세우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동백나무 집에서 "저어, 데이트 한번 해보지 않겠어요?" 싹싹한 말..

잊혀진 왕국

잊혀진 왕국 뒤편에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깨끗해서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수초가 자라고 있어서 물고기들은 그것을 먹으며 살았다. 물고기들은 왕국이 사라지건 말건 상관없었다. 그건 그렇다. 물고기들에겐 왕국이니 공화국이나 하는 건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투표 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세금 따위도 납부하지 않았다. "그런 건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야." 물고기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냇물에서 발을 씻었다. 냇물은 차가워서 잠깐 발을 담그고 있어도 금세 빨개졌다. 냇가에는 잊혀진 왕국의 성벽과 첨탑이 보였다. 첨탑에는 두 가지 색으로 된 깃발이 게양된 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냇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 깃발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것 봐. 저건 잊혀진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