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얼음사나이

chocohuh 2013. 1. 26. 15:15

나는 얼음사나이와 결혼했다.

내가 얼음사나이와 만난 것은 어느 스키장의 호텔이었다. 얼음사나이와 알게 되는 데는 안성맞춤인 장소라 할지 모른다. 젊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떠들썩한 호텔 로비의, 난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자리 의자 위에서 얼음사나이는 혼자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벌써 정오가 다 되었지만 겨울 아침의 차갑고 상쾌한 햇살이 그의 주위에만은 아직 남아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느껴졌다.

 

"저 봐, 저 사람이 얼음사나이야."

하고 내 친구가 작은 소리로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얼음사나이라는 게 대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내 친구도 잘은 몰랐다. 단지 그가 얼음사나이로 불리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틀림없이 얼음으로 돼 있을 거야. 그러니까 얼음사나이라고 불리겠지."

하고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마치 유령이나 전염병 환자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음사나이는 키가 크고, 단단해 보이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 생김새로는 아직 젊은 것 같았지만, 그 빳빳한 바늘 같은 머리카락에는 새치가, 마치 녹다 만 눈처럼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광대뼈가 얼어붙은 암석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고 손가락에는 결코 녹는 일이 없는 하얀 서리가 끼어 있었으나 그런 것을 빼고는 얼음사나이의 겉모습은 보통 인간 남자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잘 생겼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보기에 따라서는 꽤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거기에는 왠지 사람의 마음을 날카롭게 찌르는 것이 있었다.

특히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그의 눈이었다. 마치 겨울 아침의 고드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과묵하고 투명한 눈빛이다. 그것은 대충 만들어진 육체 중의 단 하나 진실한 생명의 반짝임처럼 보였다. 나는 얼마 동안 그곳에 서서 멀리서 얼음사나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얼음사나이는 한 번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지그시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치 자기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는 것처럼.

 

이튿날 오후에도 얼음사나이는 같은 장소에서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에도, 해가 지기 전에 사람들과 함께 스키를 타고 돌아 왔을 때도, 그는 전날과 똑같이 의자에 앉아 똑같은 책의 페이지 위에 똑같은 눈빛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저물어도 밤이 깊어가도 그는 창밖의 겨울 그 자체처럼 조용히 거기에 앉아 혼자서 책을 읽고 있었다.

 

4일째 오후, 나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스키장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호텔에 남아 로비를 잠시 어슬렁거렸다. 사람들이 이미 모두 스키를 타러 나가, 로비는 버림 받은 거리처럼 텅 비어 있었다. 로비의 공기는 필요 이상으로 따뜻하고 눅눅했고, 거기에는 기묘하게 울적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신발 바닥에 묻어 호텔 안으로 들어와서는 뜻하지 않게 난로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 버린 눈의 냄새였다.

 

나는 이쪽저쪽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봤다가 신문을 훌훌 넘겼다가 했다. 그러고 난 후 얼음사나이 옆에 가서, 마음을 다잡고 말을 걸어 보았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낯을 가리는 편이고, 웬만한 일이 아닌 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때 나는 아무래도 얼음사나이와 꼭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 호텔에서 묵는 마지막 밤이기도 했고,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얼음사나이와 이야기를 할 기회는 두 번 다시없을 것 같아서였다.

 

"스키는 안타세요."

하고 나는 가능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얼음사나이에게 물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아주 멀리서 부는 바람 소리라도 들은 것 같은데, 싶은 표정이었다. 그는 그런 눈으로 가만히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스키를 타지 않습니다. 이렇게 눈을 보면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 좋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그의 말은 만화책의 풍선 말처럼 공중에서 하얀 구름이 되었다. 나는 문자 그대로 내 눈으로 분명히 그의 말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손가락에 어린 서리를 가볍게 털어 냈다.

 

나는 그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얼굴이 빨개져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얼음사나이는 내 눈을 보았다. 그가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었다. 얼음사나이가 정말로 미소를 지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괜찮으시면 거기 앉으시겠어요." 하고 얼음사나이가 말했다.

"얘기 좀 하죠. 당신은 나에게 흥미가 있는 게 아니신가요? 얼음사나이란게 대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그리고 그는 아주 잠깐 웃었다.

"괜찮습니다, 아무 걱정하실 것 없어요. 저랑 얘길 한다고 해서 감기에 걸리진 않아요."

 

그렇게 해서 나는 얼음사나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들은 로비 구석자리 소파에 나란히 앉아 창밖을 떠도는 눈을 바라보면서 머뭇머뭇 이야기했다. 나는 따끈한 코코아를 주문해서 마셨다. 얼음사나이는 아무 것도 마시지 않았다. 얼음사나이도 나와 막상막하로 이야기를 하는 데 능란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우리들은 공통 화제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우리들은 처음에는 날씨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호텔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기에는 혼자 오셨어요." 하고 나는 얼음사나이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얼음사나이가 대답했다.

 

얼음사나이는 나에게 스키를 좋아하느냐, 고 물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고 나는 대답했다.

여자 친구들이 꼭 같이 와달라고 해서 왔을 뿐이다, 사실은 거의 탈 줄도 모른다. 나는 얼음사나이가 대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정말 몸이 얼음으로 되어 있는지 어떤지, 평소엔 어떤 걸 먹는지, 여름에는 어디에서 지내는지, 가족은 있는지 없는지―그런 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얼음사나이는 자기 쪽에서는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아마도 얼음사나이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얼음사나이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얼음사나이는 어찌된 영문인지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우리 집 가족 구성이며 내 나이, 나의 취미, 나의 건강상태,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 내가 사귀고 있는 친구들에 대해서, 그는 하나에서 열까지 알고 있었다. 내가 이미 훨씬 전에 잊어버린 먼 옛날의 일까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나는 어쩐지 자신이 남들 앞에서 벌거벗겨진 듯 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어째서 당신은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거죠?" 나는 물었다.

"당신은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나요?"

"아니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압니다. 그냥 알아요." 하고 얼음사나이는 말했다.

"마치 얼음 안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것처럼요. 이렇게 가만히 당신을 보고 있으면 당신에 대한 것들이 환히 보입니다."

"제 미래를 볼 수 있나요?"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미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얼음사나이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미래라는 것에는 전혀 흥미가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에게는 미래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얼음에게는 미래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단지 과거가 단단히 봉해져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거기에 봉해져 있는 겁니다. 얼음이란 건 여러 가지 것을 그런 식으로 보전할 수 있습니다. 아주 깨끗이, 아주 뚜렷이. 있는 그대로 말이죠. 그것이 얼음이란 것의 역할이자 본질입니다."

"다행이네요." 나는 말했다. 그리고 살짝 웃었다.

"그런 말 들으니 안심이에요. 전 자신의 미래 같은 거 알고 싶지 않은 걸요."

 

우리들은 도쿄에 돌아 와서도 몇 번인가 만났다. 이윽고 우리들은 주말이면 항상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함께 극장에도 가지 않았고, 찻집에도 가지 않았다. 밥조차 먹지 않았다.

얼음사나이는 식사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둘이서 공원 벤치에 앉아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들은 정말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얼음사나이는 언제까지고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 했다.

 

"왜죠?"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어째서 당신은 자신에 대해 얘기하지 않나요? 나는 당신을 좀 더 알고 싶어요. 당신은 어디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시고, 어떻게 해서 얼음사나이가 된 거죠?"

얼음사나이는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몰라."

얼음사나이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딱딱하고 하얀 숨을 공중에 내쉬었다.

"나는 과거라는 것이 없어. 나는 온갖 과거를 알고 있지. 온갖 과거를 보전하고 있지. 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과거라는 것이 없어. 나는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도 몰라. 부모님의 얼굴도 몰라. 부모님이 정말 있었는지 어떤지조차 모르지. 자신의 나이조차 몰라. 나에게 정말 나이란 게 있는지 조차 몰라."

 

얼음사나이는 암흑 속의 빙산처럼 고독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얼음사나이를 진지하게 사랑하게 되었다. 얼음사나이는 과거도 아닌 미래도 아닌, 단지 <바로 지금>의 나를 사랑해 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과거도 미래도 아닌 단지 <바로 지금>의 얼음사나이를 사랑했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는 막 스무 살이 된 참이었다. 그리고 얼음사나이는 내가 난생 처음 진지하게 좋아하게 된 최초의 상대였다. 얼음사나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그때의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설령 상대가 얼음사나이가 아니었더라도 나로서는 역시 똑같이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와 언니는 나와 얼음사나이의 결혼에 결사반대했다.

"넌 결혼하기엔 아직 너무 어려." 하고 그녀들은 말했다.

"도대체 상대방의 정확한 출신조차 모르잖니. 어디에서 언제 태어났는지조차 모르잖아. 그런 상대와 결혼을 한다는 건 친척들한테도 알릴 수가 없다고. 게다가 너, 상대는 얼음사나이야, 만약 여차 저차해서 녹아 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할래?" 하고 그녀들은 말했다.

"넌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결혼이란 것에는 반듯한 책임이 필요한 거야. 얼음사나이란게 과연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겠니."

 

하지만 그런 염려는 쓸데없는 것이었다. 얼음사나이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얼음사나이는 단지 얼음처럼 차가운 것뿐이다. 그러니까 만약 주위가 따뜻해진다 해도, 그래서 녹아버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런 차가움은 확실히 얼음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 육체는 얼음과는 다르다.

분명히 굉장히 차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체온을 앗아가거나 하는 차가움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결혼 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축복받지 못한 결혼이었다. 친구들도 부모님도 언니 동생들도, 아무도 우리들의 결혼을 기뻐해 주지 않았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다. 혼인신고를 하려고 해도 얼음사나이는 호적조차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둘이서, 우린 결혼 했다고 정한 것뿐이었다. 우리는 자그마한 케이크를 사서 그것을 함께 먹었다. 그것이 우리들의 수수한 결혼식이었다.

 

우리는 작은 아파트를 빌렸고, 얼음사나이는 생활을 위해 쇠고기를 보관하는 냉동 창고에서 일했다. 뭐니 뭐니 해도 그는 추위에는 강했고, 아무리 일해도 지칠 줄을 몰랐다. 밥조차 잘 먹지 않았다. 그러니까 고용주는 얼음사나이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좋은 급료를 주었다.

우리들은 누구에게 방해받는 일도 없이, 누구를 방해하는 일도 없이, 단 둘이서 조용히 행복하게 살았다.

 

얼음사나이에게 안기면 나는 어딘가에 살며시 고요하게 존재하고 있을 얼음덩어리를 떠올린다. 얼음사나이는 그 얼음덩이가 존재하는 장소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단단한, 그 이상 단단할 수 없으리라 생각될 만큼 단단히 얼어붙은 얼음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얼음덩어리다. 하지만 그것은 어딘가 아주 먼 곳에 있다. 그는 그 얼음의 기억을 이 세계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얼음사나이에게 안기는 게 머뭇거려졌었다. 하지만 머잖아 나는 익숙해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얼음사나이에게 안기는 것을 사랑하게까지 되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가 얼음사나이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나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우리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 끌어안고 묵묵히 그 거대한 얼음을 함께 나누었다. 그 얼음 속에는 몇 억 년에 걸친 세계의 온갖 과거가,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가두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결혼생활에 문제다운 문제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도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얼음사나이의 존재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듯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그들도 조금씩 얼음사나이에게 말을 걸기도 하게 되었다.

 

"얼음사나이라고 해도 보통 사람과 그렇게 다를 건 없네요." 하고 그들은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물론 마음속으로는 얼음사나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와 결혼한 나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들>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틈이 메워지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들 사이에는 아이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과 얼음사나이 사이에는 유전자 결합인지 뭔지가 어려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아이가 없는 탓도 있고 해서 이윽고 나는 시간이 펑펑 남아돌게 되었다. 아침나절에 재빨리 집안일을 정리해 버리고 나면 더 이상 아무 할 일이 없게 됐다.

나는 수다를 떨거나 같이 어딘가 놀러 나갈 친구도 없었고, 이웃에 사귄 사람도 없었다. 엄마와 언니 동생은 내가 얼음사나이와 결혼한 데에 아직 화를 내고 있어 나와는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들은 나를 집안의 수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한테는 전화를 걸 상대조차 없었다. 얼음사나이가 창고에서 일하고 있는 사이, 나는 줄곧 혼자서 집안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했다. 원래 나는 바깥에 나가기보다는 집안에 있는 걸 좋아 하는 데다 혼자 있는 것도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아직 젊었고, 그런 아무 변화도 없는 하루하루의 반복을 이윽고 고통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지루함이 나를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그 반복성이었다.

그런 반복 속에서는 왠지 나 스스로가 반복된 그림자처럼 생각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남편에게 제안했다. 기분전환으로 둘이서 어딘가 여행이라도 가지 않겠느냐고.

"여행?" 하고 얼음사나이는 말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여행을 가지? 넌 나랑 같이 있는 게 행복하지 않니?"

"그런 게 아니야." 하고 나는 말했다.

"난 행복해. 우리들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하지만 난 따분해. 어딘가 멀리 가서, 본 적이 없는 것을 보고 싶어. 들여 마신 적 없는 공기를 마셔보고 싶어. 알겠지? 그리고 우린 신혼여행도 가지 않았는걸. 우린 돈도 많이 모았고, 유급 휴가도 잔뜩 쌓여 있잖아. 느긋이 여행쯤 해도 괜찮을 때야."

 

얼음사나이는 얼어붙은 듯 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숨은 공중에서 쨍. 하는 소리를 내며 얼음 알갱이가 되었다. 그는 무릎 위에다 서리가 어린 긴 손가락을 깍지 끼었다.

 

"그렇구나, 만약 네가 그렇게 여행을 가고 싶다면 난 별로 이의는 없어. 나는 여행을 하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서 네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난 뭐든지 할 테고, 어디라도 갈 거야. 냉동 창고 일은 쉬려고 들면 쉴 수 있을 거야. 지금까지 아주 열심히 일해 왔으니까.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근데 넌 예를 들어 어딜 가고 싶니?"

"남극은 어떨까."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남극을 고른 것은 추운 곳이라면 틀림없이 얼음사나이가 흥미를 갖겠지 싶어서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훨씬 전부터 남극에는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로라도 보고 싶었고, 펭귄도 보고 싶었다. 나는 자신이 후드가 달린 모피 코트를 입고 오로라 아래에서 펭귄 무리와 노는 모습을 상상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남편인 얼음사나이는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것은 날카로운 고드름처럼 내 눈을 통해 머리 뒤쪽까지 꿰뚫었다. 그는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겼으나 이윽고 반짝반짝한 목소리로 그러자, 고 했다.

"좋아, 네가 만약 그걸 원한다면 남극에 가야 잖겠니. 정말 그것으로 좋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주일 후라면 나도 휴가를 낼 수 있을 거야. 그 사이에 여행 채비도 할 수 있을 거구. 정말 그걸로 되는 거지?"

그렇지만 나는 곧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얼음사나이가 고드름 같은 시선으로 너무나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까 머릿속이 차가워져서 굳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남편에게 남극에 가자고 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이유는 모른다. 내가 '남극'이란 말을 꺼낸 이후로 남편 안에서 뭔가 변해버린 듯 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남편의 눈은 전보다 훨씬 고드름처럼 날카롭게 되었고, 남편의 숨결은 전보다 훨씬 하얗게 되었으며, 남편의 손가락은 전보다 훨씬 많은 서리가 어리게 되었다. 그는 전보다 훨씬 말이 없어졌고, 훨씬 완고해진 것 같았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먹지 않게 되었다. 그런 것들이 나를 지독히 불안하게 했다. 여행을 떠나기 5일전에 나는 결심하고 남편에게 제안해 보았다.

 

"남극에 가는 건 역시 그만 두자." 라고 나는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남극은 역시 굉장히 추울 테고, 몸에도 안 좋을지 몰라. 좀 더 평범한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유럽이 좋지 않을까, 스페인 근처에서 느긋이 쉬는 거야. 와인도 마시고, 파엘라도 먹고, 투우도 보고 말이야."

하지만 남편은 응하지 않았다. 그는 얼마 동안 꼼짝 않고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나 깊어, 나는 어쩐지 자신의 육체가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을 정도였다.

"아니, 나는 스페인 같은 데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아." 하고 남편인 얼음사나이는 딱 잘라 말했다.

"안 됐지만, 나한테는 스페인 같은 데는 너무 덥기도 하고, 너무 먼지가 많아. 요리도 너무 맵고. 게다가 남극행 티켓도 두 사람 것을 이미 사두었어. 널 위해 모피 코트도, 털 달린 부츠도 샀어. 그런 걸 죄다 무용지물로 할 순 없잖겠어. 이제 와서 안 갈 순 없어."

 

솔직히 나는 두려웠다. 남극에 가면 우리 신변에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 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기분 나쁜 꿈을 꾸었다. 언제나 같은 꿈이었다. 나는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지면에 뻥 뚫린 깊고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채 얼어붙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얼음 속에 갇힌 채로 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다. 나에게 의식은 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다. 그것은 지독히 이상한 기분이다. 자신이 1초 1초 과거화 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나에게는 미래라는 것이 없다. 그저 단지 과거를 쌓아 갈 뿐인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그런 나를 들여다본다. 그들은 과거를 보고 있다. 나는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광경인 것이다.

그리고 눈을 뜬다. 옆에서는 얼음사나이가 자고 있다.

그는 숨 하나 쉬지 않고 자고 있다. 마치 죽어서 얼어붙어 버린 무엇처럼. 그래도 나는 얼음사나이를 사랑한다. 나는 운다. 내 눈물이 그의 뺨에 떨어진다. 그러면 그는 눈을 뜨고 내 몸을 안는다.

 

"기분 나쁜 꿈을 꿨어." 나는 말한다.

그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건 단지 꿈이야." 하고 그는 말한다.

"꿈은 과거에서 오는 거야. 미래에서 오는 게 아니야. 그것은 너를 속박하지 않아. 네가 꿈을 속박하고 있는 거야. 알겠지?"

"으응." 하고 나는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확신이 없다.

 

나와 남편은 결국 남극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을 중단 시킬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극행 비행기의 파일럿과 스튜어디스는 모두 지독히 말이 없었다. 나는 창밖 광경을 보고 싶었지만 구름이 두터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창문에는 얼음이 쫙 끼어 버렸다. 남편은 그 동안 줄곧 묵묵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내 안에는 바야흐로 여행을 떠난다는 그런 흥분이나 기쁨이 없었다. 하기로 한 일을 잘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트랩에서 내려 남극 대지에 발을 댄 순간, 남편의 몸이 기우뚱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눈 깜짝할 새보다 짧게, 한 순간의 반쯤 동안이었으니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고, 남편은 얼굴에 털끝만큼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으나, 나는 놓치지 않았다. 무언가 격렬하게, 그러나 은밀히 동요되었던 것이다.

나는 가만히 남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고, 그리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곳이 네가 바랐던 땅이었니." 하고 그가 말했다.

"그래." 하고 나는 대답했다.

 

얼마만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남극은 그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적막한 땅이었다. 그곳에는 사람이라곤 거의 살지 않았다. 거기에는 특징이 없는 작은 마을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마을에는 역시 마찬가지로 특징이 없는 작은 호텔이 하나 있었다. 남극은 관광지가 아닌 것이다. 그곳에는 펭귄의 모습조차 없었다. 오로라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디에 가면 펭귄을 볼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묵묵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내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이에 펭귄 그림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그들은 묵묵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는 고독했다. 마을을 한 발자국 벗어나면 거기에는 얼음밖에 없었다. 나무도 없고, 꽃도 없고, 강도 연못도 아무것도 없었다. 어딜 가든 거기에 있는 것은 얼음뿐이었다. 시야가 닿는 한 끝없이 얼음의 황야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하얀 숨을 내쉬며 손가락에 서리를 띄고, 고드름 같은 눈으로 먼 곳을 쏘아보면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질리지도 않고 정력적으로 돌아 다녔다. 그리고 곧 토착어를 익혀 마을 사람들과 얼음처럼 딱딱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몇 시간이고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대체 무엇에 대해 그렇게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지,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남편은 그곳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남편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나는 그 점에 대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나 혼자만 뒤에 남겨져 버린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내팽개쳐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두꺼운 얼음에 둘러싸인 막연한 세계 속에서 나는 모든 힘을 잃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안절부절 할 힘조차 사라져 버렸다. 나는 감각의 나침반 같은 것을 어딘가에서 잃어버리고만 것 같았다. 나는 방향 감각을 잃고, 시간을 잃고, 자신이라는 존재의 무게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문득 생각해 보면, 나는 얼음의 세계 안에서, 색깔이란 것을 잃어버린 영원한 겨울 속에서, 달랑 홀로 무각감에 봉해져 버린 것 같았다.

감각을 거의 상실한 후에도 나는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남극에 있는 나의 이 남편은 예전의 내 남편이 아닌 것이다.>

 

딱히 어디가 다른 것도 아니다. 그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늘 나에게 마음을 쓰고, 상냥한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본심에서 우러난 말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역시 느껴진다. 얼음사나이는, 스키장의 호텔에서 만난 그 얼음사나이와 다른 얼음사나이라는 것이.

그러나 나는 그것을 누군가에게 호소할 수도 없다. 남극 사람들은 다들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내가 말하는 언어는 그들에게는 단 한마디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모두들 하얀 숨을 내쉬며 얼굴에 서리를 띄고 반짝반짝한 남극어로 농담을 하거나 토론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한다.

나는 줄곧 혼자서 호텔 방에 처박혀 앞으로 몇 달이고 개일 것 같지 않은 회색 하늘을 보며, 지독히 복잡한 (그리고 나로서는 익혀질 턱이 없는) 남극어 문법을 공부하고 있었다.

 

비행장에는 이미 비행기라곤 없었다. 우리들을 실어온 비행기가 재빨리 떠나버린 뒤, 그곳에 착륙한 비행기는 그 이상 한 대도 없었다. 그리고 활주로는 이윽고 딱딱한 얼음 밑에 묻혀 버렸다. 내 마음과 똑같이.

 

"겨울이 오는 거야." 하고 남편은 말했다.

 

"굉장히 긴 겨울이야. 비행기도 못 오고, 배도 오지 못해. 죄다 다 얼어붙어 버렸어. 아무래도 우리는 봄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 하고 그는 말했다.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남극에 와서 3개월이 지난 무렵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자신이 낳는 아이가 작은 얼음사나이라는 것을. 내 자궁은 얼어붙고, 양수에는 엷은 얼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차가움을 자신의 뱃속에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고드름 같은 눈을 하고 손가락에 서리를 띄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들 새로운 한 가족이 남극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두 번 다시없을 거라는 것을. 영원한 과거가, 그 터무니없는 무게가 우리들의 발목을 꽉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미 그것을 뿌리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마음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나의 온기는 아주 멀리 떠나 버렸다.

때때로 나는 그 온기에 대해서조차 잊어버린다. 그러나 아직 어떻게든 눈물은 흘릴 수 있다. 나는 정말로 외톨이인 것이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고독하고 차디찬 장소에 있는 것이다. 내가 울면 얼음사나이는 내 뺨에 입을 맞춘다. 그러면 내 눈물은 얼음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는 그 눈물의 얼음을 손가락으로 떼어, 그것을 혀 위에 올려놓는다.

 

"알지? 널 사랑하고 있어."

 

하고 그는 말한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건 잘 알고 있다. 얼음사나이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하얗게 얼어붙은 그의 말을 과거로 날려버린다.

나는 운다. 얼음 눈물을 똑 똑 떨어뜨린다. 머나먼, 얼어붙은 남극의 얼음집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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