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녹색짐승

chocohuh 2012. 12. 20. 09:30

남편이 평소처럼 일터로 나가자 뒤에 남은 나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나는 혼자 창가 의자에 앉아 커튼 틈으로 물끄러미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멍하니 정원을 보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다 보면 문득 할 일이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원에 있는 많은 것들 중에 나는 특히 메밀잣 밤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옛날부터 이 메밀잣 밤나무를 좋아하였다. 어릴 적 나는 그 나무를 지금 있는 자리에 심었다. 그리고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 메밀잣 밤나무를 마치 친구처럼 여기고 있었다. 나는 메밀잣 밤나무와 몇 번이나 대화도 나누었다.

 

그때도 아마 나는 마음속으로 나무와 대화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사방이 완전히 어두웠던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랜 시간 거기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자 어딘가 먼 곳에서 스적스적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그 소리는 나 자신의 몸 속에서 들려오는 듯하였다. 무슨 환청처럼. 몸이 자아내는 암흑의 전조처럼. 나는 호흡을 멈추고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나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소름이 확 끼칠 정도로 불길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마침내 메밀잣 밤나무 뿌리 언저리 땅이, 마치 무거운 물이 지표로 뿜어 올라오듯 뭉글뭉글 부풀어 올랐다. 나는 숨을 삼켰다. 땅이 갈라지고 부풀어 오른 흙이 흘러내리면서 그 안에서 끝이 뾰족한 손톱 같은 것이 모습을 내밀었다. 나는 주먹을 꼭 쥐고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쏘아보았다. 나는 무언가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손톱은 기운차게 흙을 파냈고 구멍은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 스멀스멀 녹색 짐승이 기어 나왔다.

 

짐승은 번들번들 빛나는 녹색 비늘로 온몸이 덮여 있었다. 짐승은 흙 속에서 나오자 몸을 흔들어 비늘에 묻은 혼을 털어냈다. 코는 유난히 길고 끝으로 가면 갈수록 녹색이 짙었다. 코끝은 채찍처럼 가늘고 뾰족했다. 그러나 눈은 보통 사람 같은 눈이었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 눈에 감정 같은 것이 깃들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나 당신의 눈처럼.

 

짐승은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와 가느다란 코끝으로 문을 두드렸다. 톡톡톡톡. 마른 소리가 온 집 안으로 울려 퍼졌다. 나는 짐승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가만가만 안쪽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이 근처에는 집 한 채 없는데다 일하러 나간 남편은 한밤중이 되어야 돌아온다. 뒷문으로 도망칠 수도 없다. 내가 사는 집에는 문이 딱 하나밖에 없는데 그 문을 저 소름끼치는 짐승이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숨소리를 죽이고 집에 아무도 없는 척하였다. 짐승이 단념하고 어디론가 가버리기를 바라며. 하지만 짐승은 포기하지 않았다. 짐승은 코끝을 더욱 가늘게 모으고 그것을 열쇠 구멍에 넣어 달그락달그락 더듬더니 마침내 간단히 문을 열고 말았다. 찰칵 하고 소리가 나더니 잠금 쇠가 풀리면서 문이 삐죽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코가 주륵주륵 안으로 들어왔다. 코는 한참이나, 마치 뱀이 대가리를 처박고 상황을 살피듯 문틈으로 집 안을 살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면 칼을 가지고 문 옆으로 가서 그 코끝을 싹둑 잘라버리는 건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부엌에는 잘 드는 칼이 여러 개나 있다. 그런데 짐승은 나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싱긋이 웃었다. 당신, 그래 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라고 녹색 짐승은 말했다. 짐승의 말투는 어딘가 아주 기묘했다. 언어를 잘못 기억한 것처럼. 내 꼬리는 도마뱀의 꼬리 같아아아서 말이죠. 몇 만 번을 잘라도 또 자라나아안답니다. 게다가 잘릴 때마다 더 길고 튼튼해지는거어얼요. 애쓰면 애쓰는 만큼 허허헛수고예요. 그리 고 짐승은 그 띠룩띠룩한 눈을 팽이처럼 빙빙 굴렸다.

 

저 놈이 사람의 마음을 읽는단 말이야. 그렇다면 일이 아주 성가시게 되었네.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자기 멋대로 읽는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상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징그러운 짐승일 경우에는 더욱이.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대체 저 놈은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일까. 나를 먹어치울 작정인가. 아니면 나를 땅 속으로 데리고 갈 작정인가. 그러나 어찌되었든 저 놈이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하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녹색 비늘 사이로 툭 튀어나와 있는 분홍색 손발에는 길쭉한 손톱이 나 있고, 그것은 그저 보고만 있기에는 오히려 귀엽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암만 보아도 그 짐승은 나에게 악의나 적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요, 라고 그 놈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짐승이 고개를 갸웃하자 녹색 비늘이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냈다. 마치 커피 잔이 가득 놓인 테이블을 살며시 흔든 것처럼. 내가 당신을 먹을 리가 있겠어요. 참 너무하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악의도 적의도 없어요, 그런 것을 품고 있을 터어억이 없지 않아요, 라고 짐승은 말했다. 그래, 틀림없어. 저 놈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어.

 

저. 부인, 나는 당신한테 프러포즈를 하러 왔어요. 알겠어요? 저 깊고 깊은 곳에서 일부러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단 말이에요. 아주 힘들었어요. 흙도 엄청 많이 팠어요. 손톱아 이렇게 다 갈라졌잖아요. 만약 나한테 악의가 있었다면 악의가 있었다면 악의가 있었다면 그렇게 힘들고 성가신 일을 할 리가 없죠. 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서 좋아서 차아암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여기까지 온 겁니다. 나는 저 깊고 깊은 곳에서 당신을 사모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기어 올라온 겁니다. 모두들 그런 나를 말렸어요. 하지만 나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용기도 필요했어요. 너 같은 짐승이 나한테 프러포즈를 하다니 뻔뻔스럽다고 여겨지지 않을까 해서 말이에요.

 

나는 마음속으로 그야 당연하잖느냐고 생각하였다. 나한테 구애를 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뻔뻔스러운 짐승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짐승의 얼굴에 애틋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애틋함을 뒤따르듯 비늘의 색이 녹색에서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다 몸집마저 폭삭 쪼그라든 듯 작게 보였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 조그마해진 짐승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면 이 짐승은 감정의 변화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변신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몰골에 비하면 그 마음은 막 만든 매쉬맬로처럼 부드럽고 상처 입기 쉬운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내게도 승산은 있다 나는 다시 한 번 시험해 보자고 생각하였다. 참 내 너는 흉측한 짐승에 불과하잖아, 라고 나는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생각해보았다. 내 마음에 윙윙 울릴 정도로 크게. 참 내 너는 흉측한 짐승에 불과하잖아 그러자 짐승의 비늘은 점점 보라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눈은 나의 악의를 빨아들이기라도 한 듯 점차 부풀어 올라 마치 무화과처럼 얼굴 표면에서 튀어나왔고 거기에서 빨간 즙 같은 눈물이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는 이제 짐승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시험 삼아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잔혹한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육중한 의자에다 짐승을 철사 줄로 꽁꽁 묶어 뾰족한 핀셋으로 녹색 비늘을 하나하나 뽑아보기도 하고. 잘 드는 칼끝을 불에 빨갛게 달구어서, 그것으로 오동통하고 야들야들한 분홍색 허벅지를 몇 번이나 그어 대보기도 하고. 짤짤 끓는 인두로 그 무화과처럼 툭 튀어나온 눈을 힘껏 푹 찔러보기도 하였다. 내가 그런 장면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상상할 때마다, 짐승은 실제로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몸을 뒤틀고 뒹굴며 비명을 짜내고 괴로워했다. 색깔 있는 눈물을 흘리고 찐득한 체액 같은 것을 뚝뚝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귀로는 장미향이 나는 회색가스를 품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나를 원망스럽다는 듯 똑바로 쳐다보았다. 부인, 부탁입니다. 제발 부탁해요, 그런 끔찍한 생각은 거두어 주세요, 라고 짐승은 말했다. 설사 생각할 뿐이라 하하하더라도 생각지 말아 주세요, 라고 그 짐승은 애닮게 말했다. 나는 나쁜 마음은 어없어요. 나는 나쁜 짓은 하지 않아요. 나는 그저 당신을 줄곧 사모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런 짐승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참 내 기가 막혀서. 느닷없이 우리 집 정원으로 기어 올라온 것은 너잖아, 게다가 허락도 없이 문까지 열고 들어오지 않았냐고,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내가 와 달라고 언제 너를 부르기라도 했니. 나는 내가 생각하고 싶은 만큼 무엇이든 생각할 권리가 있어. 그래서 나는 훨씬 더 잔혹하고 끔찍한 생각을 하였다. 나는 온갖 기계와 기구를 동원하여 짐승의 몸을 학대하고 갈가리 짓찢었다 생명이 있는 존재를 괴롭히고 몸부림치게 하는 갖가지 방법을 나는 다 생각하였다. 이봐, 짐승 너는 여자라는 것을 잘 몰라. 이런 종류의 일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다고. 그런데 그러는 동안 짐승의 윤곽이 부옇게 번지더니 그 멋들어진 녹색 코까지 지렁이처럼 쪼그라들고 말았다. 짐승은 바닥 위에서 몸을 꿈틀거리면서 입을 움직여 마지막으로 나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 하였다. 깜빡 잊고 있었던 아주 오래고 소중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처럼, 엄숙하게. 그러나 그 입은 고통에 움직임을 멈추고. 애처롭게 부풀어 오른 눈만이 안타깝다는 듯 공중에 남았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어.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네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너에게는 도움이 안 돼. 너는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네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어. 너란 존재는 이제 완전히 끝나버린거야. 그러자 눈도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밤의 어둠이 소리도 없이 방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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